SOS 땅밑도시

   수잔 마르텔 지음
   정 동화 옮김
  
   우주과학어드벤처ET·ET11
   SOS 땅밑도시
   수잔 마르텔 / 정 동화 옮김
  
  
   지구에 핵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모두들 말합니다. 핵 전쟁이 터지면 지구는 방사능 때문에 멸망합니다.
   그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안 캐나다 사람들은 땅 밑에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나기 전에 400명 가량이 지하도시로 들어가 땅위와 통하는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그리고 몇백 년이 흘러 한 소년이 법을 어기고 방사능과 독으로 꽉 찼다는 세상으로 나옵니다. 그 소년 루크는 전쟁으로 멸망한 뒤 몇백 년이 흐른 지구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사람들이 몇백 년 동안 땅 밑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또 땅위는 어떤 세상이 되었는지 구경해 보셔요.
  

   모험에 나선 루크

  
   두 소년―루크와 에릭은 조심스럽게 살그머니 둘레를 둘러보았다.
   "아무에게도 들키면 안 돼!"
   두 소년의 앞에는 흰 대리석을 깐 터널이 은빛 불빛을 받으면서 끝없이 이어져 있다.
   여기는 땅밑 도시의 변두리여서 좀처럼 사람이 오지 않는 곳이다. 땅 위와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동으로 조종되는 급행 열차가 이 언저리에서는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루크와 에릭은 바로 앞 역에서 급행 열차를 내려 여기까지 1킬로미터쯤 되는 거리를 '움직이는 보도'를 타고 왔다.
   '움직이는 보도'는 전혀 소리를 내지 않고 매끄럽게 움직인다. '움직이는 보도'는 두 줄로 나란히 있는데, 하나는 북쪽으로 움직이고 또 하나는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움직이는 보도 양쪽을 자동으로 조종되는 급행 열차가 객차 10칸을 끌고 플라스틱으로 된 투명 터널 속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고 있다.
   두 소년은 움직이는 보도 위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며 북쪽과 남쪽으로 향하는 자동 조종 급행 열차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땅밑 도시의 구석구석까지 공기를 보내는 장치는 여느 때보다 훨씬 소리가 낮았지만 두 소년은 그런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저 봐, 열차가 왔어!"
   자동 조종 급행 열차는 북쪽과 남쪽에서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엇갈려 지나갔다.
   어느 쪽 열차에도 타고 있는 손님은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두 소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땅밑 도시의 이런 변두리까지 와 있는 것을 누군가 본다면 의심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자, 가자!"
   루크는 움직이는 보도에서 뛰어내렸다. 에릭도 뒤따라 뛰어내려 두 소년은 있는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뛰어가는 두 소년의 훨씬 앞에 오른쪽으로 흰 대리석 벽을 도려 낸 좁은 통로가 있다. 그리고 그 통로가 끝나는 곳에는 꼭 닫힌 튼튼한 문이 있다.
   만일 누군가 바깥에서 그 문 가까이 다가오기라도 하면 문에 붙어 있는 특별한 장치가 곧 온 도시에 비상 경보를 울려 댄다.
   또 누군가 땅밑 도시를 빠져나가려고 안에서 그 문 가까이 갔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땅밑 도시 슬레얼의 여러 세기에 걸친 오랜 역사를 조사해 봐도 땅 위로 통해 있는 그 문으로 나가려고 했던 사람은 단 넷밖에 없다. 그 네 사람은 곧 붙잡혔고 미친 사람으로 다루어져 수용소에 갇혔다. 그 뒤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루크는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그 문 쪽으로 조심조심 다가가 문에 붙어 있는 전기 장치 감시기 몇 미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 곳에서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면 곧 비상 경보가 울리기 시작할 것이다.
   루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 땅 위로 통하는 문에 마음이 끌렸었다. 그리고 어찌된 셈인지 요즈음 한층 더 그 문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다. 학교 공부가 끝나면 날마다 그 문이 있는 곳에 가지 않고는 못 배겼다.
   그 덕분에 루크는 뜻하지 않게 땅 위로 통하는 비밀 통로를 발견하게 되어 모험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친구 에릭에게만 살짝 말해 주었다.
   두 소년은 대리석 벽이 깨어져 틈이 생긴 곳에 닿았다.
   한 달 전쯤 땅밑 도시에 지진이 일어나 전력에 손해를 준 일이 있었다. 모든 곳에 공기를 보내는 중요한 장치가 잠시 동안 멈췄다. 급히 보조 모터를 움직여 위기를 넘겼으나 그래도 12분 가까이 멈춰 있었다.
   어딘지 먼 곳에서부터 땅이 울리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대리석으로 덮여 있는 땅밑 도시의 벽 여기저기에 금이 가며 돌가루 먼지가 뽀얗게 일었지만 지진은 곧 멈췄다.
   땅밑 도시를 다스리고 있는 최고 회의의 방송에서는 아무 데도 큰 변동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 뒤 정밀한 지진계로 조사한 최고 회의의 지도자들은 이제 그런 지진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방송했으므로 시민들은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 지진이 매우 민감한 지진계로도 전혀 미리 알 수 없었을 정도로 갑자기 일어난 점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러 세기에 걸쳐 단 한 번도 멈춘 일이 없는 거대한 발전기가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진이 있었던 그 날부터 전력이 갑자기 약해졌다. 전등 불빛은 끊임없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했다. 움직이는 보도는 속도가 완전히 떨어졌다. 그 때문에 시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구급 가방을 나누어 받았다.
   루크와 에릭은 지금 그 구급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다. 플라스틱 통으로 되어 있는 그 속에는 방독 마스크와 광선 헬멧이 들어 있어 위급할 때 땅 밑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지켜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배급된 일로 해서 루크는 땅 위의 신기한 세계를 탐험하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광선 헬멧이 없었다면 루크는 캄캄한 벽 틈으로 들어가려는 생각 따위는 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방독 마스크를 가지지 않았다면 땅 위에 가득 차 있다는 해로운 공기 속으로 나가려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일지 않았을 것이다.
   루크는 손을 바닥에 짚고 엎드려 그 벽 틈으로 들어가 몇 미터 걸어갔다. 에릭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았다. 그러나 한 발짝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루크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에릭, 왜 그래? 경보가 울려도 괜찮니?"
   "너무 놀라서 그래."
   "넌 나하고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쟎아? 빨리 와."
   에릭은 그제야 겨우 캄캄한 틈새기로 들어갔다. 학교 가방이 낮은 바위에 부딪치고, 무릎에서 구급 가방이 걸리적거린다. 흰 제복 웃옷자락이 바위 모서리에 걸렸지만 루크의 침착한 목소리가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루크는 날마다 여기에 와서 이 구멍 속에 들어오곤 했으므로 어떻게 하면 안전한지 다 알고 있었다. 그는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플라스틱 통을 열어 광선 헬멧을 꺼내어 썼다.
   헬멧 앞에 달려 있는 단추를 누르자 뇌파가 전기를 내는 원동력이 되어 밝은 광선이 두 소년을 밝게 비췄다. 이어서 투명한 방독 마스크를 꺼내어 코와 입을 가렸다. 이렇게 하면 6시간 동안은 숨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에릭, 준비되었니?"
   루크가 그렇게 말하자, 에릭은 조금 머뭇거렸다. 땅밑 도시에 사는 다른 소년들처럼 그도 장난으로 헬멧을 쓰기도 하고 방독 마스크를 써보기는 했다. 그러나 이렇게 정말로 쓰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에릭은 조심스럽게 광선 헬멧과 방독 마스크를 꺼냈다. 땅밑 도시의 최고 회의에서 배급받은 도구를 이런 일에 쓴다는 것이 왠지 죄라도 저지르는 것처럼 생각되어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에릭은 용감하게 광선 헬멧을 쓰고, 망설이면서도 단추를 눌렀다. 광선이 환하게 언저리를 비췄다.
   "됐어. 이제야 너도 뇌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어."
   루크는 그렇게 말하고 빙긋이 웃었다.
   루크가 방독 마스크의 끈을 매고 있는 에릭의 팔을 잡고 말했다.
   "먼저 너는 이 비밀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나는 아무에게도......우리 형 폴에게도 한 마디 하지 않았으니까 말야."
   "걱정하지 마......나는 약속해."
   "그것만으로는 안 돼. 땅밑 도시에서 선서하는 방법으로 맹세해 줘."
   캄캄한 터널 속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 있는 단짝 친구인 두 소년을 광선 헬멧에서 나오는 두 줄기의 불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다.
   소년들이 입고 있는 희고 짧은 쟈켓이 반짝반짝 빛나고 두 사람의 얼굴은 매우 진지했다.
   에릭은 오른손을 높이 쳐들고 말했다.
   "나......에릭 6B12는 땅밑 도시의 거대한 발전기에 대고 절대로 너의 비밀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만일 이 맹세를 깨뜨렸을 때에는......."
   에릭은 꼴딱 침을 삼키고 우물쭈물했다.
   루크가 재촉했다.
  
   "어서 계속해."
   "......만일 맹세를 지키지 않았을 때에는 나를 땅 위에 내버려 비참하게 죽게 해도 좋다."
   루크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이 갑자기 마스크를 고쳐 쓰는 루크의 손을 잡고 말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까 너무하다. 왜냐하면 지금 맹세대로 우리는 이제부터 하려는 거쟎아?...... 우리는 땅 위로 가려는 참이쟎아? 틀림없이 비참하게 죽고 말 거야."
   루크는 신음했다.
   (에릭은 하필이면 지금 그런 재수 없는 말을 할까? 자기를 여기에 데리오 오려고 설득하는데 내가 얼마나 애를 먹었는데.)
   루크는 가까스로 말했다.
   "잘 들어 봐. 위험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너에게 몇 번이나 말했쟎아?"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알지?"
   "그거야 내가 시험해 보았기 때문이지. 나는 1주일 동안이나 날마다 여기에 와서 시험해 보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어."
   학교 가방을 내려놓고 루크는 뚜껑을 열었다. 그는 시청각 테이프 밑에 감춰 둔 폴리세네라는 재료로 만들어진 주머니 4개를 꺼냈다.
   루크는 그것으로 에릭의 구두를 싸더니 끈으로 단단히 붙들어 맸다.
   에릭이 감탄해서 말했다.
   "루크, 너는 정말 조그마한 일에도 빈틈없이 생각이 미치는구나!"
   "어떤 일이든 완벽하게 해야 하니까."
   루크는 자기의 구두도 그 주머니로 싸 끈으로 단단히 매면서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 곳에서 돌아왔을 때 사람들에게 눈치채이면 끝장이니까."
   더러운 곳이라곤 한 구석도 없는 땅밑 도시를 흙묻은 구두를 신고 걸어다니기라도 하는 날에는 곧 소동이 벌어질 것이 뻔하다.
   루크는 에릭의 손을 잡아끌며 좁은 터널 안으로 들어섰다. 에릭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려고 루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땅 위는 아주 멋있어. 오래된 책이랑 텔레비젼에서 보는 그런 것과는 아주 달라. 하늘은 끝없이 넓고 푸르고 햇빛은 네 손을 따뜻하게 녹여 줄 거야. 땅바닥은 초록색 풀로 하나 가득 덮여 있지."
   캄캄한 터널은 오르막길로 되어 있어 지나가기가 힘들었다. 길은 점점 더 험해졌다.
   얼마쯤 뒤 두 소년이 모퉁이를 도니 좁던 터널이 갑자기 넓어졌다. 찬 공기가 두 소년의 얼굴에 닿았다. 언저리의 벽은 물기가 많아 질척했고 미끈미끈한 이끼가 나 있다.
   에릭이 또다시 주춤거리며 말했다.
   "땅 위를 덮고 있는 해로운 가스는 대체 어떤 것일까?"
   루크는 소리내어 웃었다.
   "해로운 가스니 어쩌니 하는 것은 정말이지 잘못된 생각이야. 그런 것은 조금도 없어. 까마득한 옛날에 다 없어져 버렸어."
   "어떻게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있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안다는 거지?"
   루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야 분명하게 알지는 못해. 하지만 나는 그 일에 대해서는 틀림없다고 생각해."
   어째서 그가 그토록 자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지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마음속의 목소리가 그렇게 만든 것이리라. 루크는 땅 위에 가까와질수록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세계에 마음이 끌렸다. 그 곳은 크나큰 전쟁이 일어나 세계가 파멸되기 전까지 사람이 살고 있었다.
   두 소년은 자꾸자꾸 앞으로 걸어나아갔다. 두 소년의 광선 헬멧에서 나오는 불빛은 아주 약해져 있었다. 터널 출구 가까이서 에릭은 걸음을 멈추더니 무거운 듯이 말했다.
   "틀림없이 여기가 우리 땅밑 도시로 통하는 입구였다고 생각돼?"
   루크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지난번 지진으로 저 출입이 금지된 문 가까이까지 틈이 벌어진 거야."
   "저어, 루크. 너는 어떻게 혼자 벽에 생긴 틈 속에 들어가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니?"
   에릭은 여느때는 얌전한 루크가 어떻게 이런 모험을 할 수 있는지 이상해서 견딜 수 없었다.
   땅밑 도시의 한정된 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에릭은 폐쇄공포증(방문을 닫아 두면 무서워서 추울 때에도 문을 열어 놓는 공포증의 하나)이라는 것이 대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좁은 터널을 지나올 때에도 무서움 따위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슬레얼 어린이들에게 있는,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증은 에릭도 가지고 있었다.
   루크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조금 뒤 천천히 대답했다.
   "그건 말이야. 어디선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야."
   루크는 에릭의 말을 듣고 모험 이유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가 처음으로 땅 위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너무도 자연스러워 새삼스럽게 말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모험 이유를 어떤 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겠다고 루크는 생각되었다.
   에릭이 이를 딱딱 부딪치며 말했다.
   "추워졌어!"
   그들은 땅밑 도시의 적당한 온도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기후의 변화에 대해서 몹시 민감했다.
   루크가 웃으며 말했다.
   "투덜거리지 마. 이제 곧 따뜻해질 거야. 너무 따뜻할지도 모르지만."
  

   처음 본 땅 위 세계

  
   루크의 마지막 말을 듣고 에릭은 겁에 질렸다. 지금껏 에릭은 땅 위에는 해로운 가스가 꽉 차 있어 위험하다는 말만 들어 왔기 때문이다.
   오래 전 큰 전쟁이 일어난 동안 지구는 어디나 다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모든 것이 다 멸망했다.
   캐나다에 있는 로열 산 기슭의 동굴로 피해 들어간 많지 않은 사람만이 겨우 살아났다. 그 사람들은 크나큰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여러 해 전부터 피난할 곳을 미리 살펴 두었던 것이다.
   그 행운의 사람들은 겨우 몇백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땅 밑에 도시를 만들고 땅 위로 통하는 길을 아연으로 된 튼튼한 문으로 꼭 닫아 버렸다. 그들이 그 때까지 알았던 땅 위의 문명 세계는 사람의 어리석음 때문에 흔적도 없이 멸망해 버린 것이다.
   갑자기 에릭이 말했다.
   "저건 대체 뭘까?"
   땅 밑에 있는 폭포 소리와도 비슷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두 소년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루크도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
   "뭔지 모르겠어. 나는 이제까지 저런 소리를 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걸......잠깐만 기다려 봐."
   루크는 언저리를 살펴가며 터널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깜짝 놀란 듯이 멈춰섰다.
   산중턱 그리 높지 않은 곳에 뚫려 있는 터널 입구에 작은 폭포가 생겼던 것이다. 그 폭포는 부드럽게 단조로운 소리를 내며 바위 위에 물방울을 튕기고 있다.
   루크는 터널 입구에서 얼굴을 내밀어 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하늘에서 물이 떨어져내리고 있을 뿐이다.
   한편 에릭은 난생 처음으로 와 본 곳에 혼자 남아 있게 된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급히 루크 뒤를 쫓아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을 바라보더니 신기한 얼굴로 물었다.
   "이 물은 대체 어디서 떨어지는 거지?"
   두 소년 모두 그것이 비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에릭은 난생 처음 보는 땅 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어딜 보나 온통 질척거리쟎아."
   여느때 먼 곳을 보는 데 익숙해 있지 않은 그의 눈은 촛점을 잘 맞출 수 없었다. 눈 아래 보이는 세계가 희미하고 흐릿했다.
   "푸른 하늘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고 초록빛 식물도 없쟎아? 그뿐만인가? 조금도 따뜻하지 않고......"
   루크는 몹시 실망한 모양이었다. 좀더 언저리를 잘 보려고 몸을 쑥 앞으로 내밀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떨어져내리는 물뿐이었다.
   "나는 도무지 모르겠어."
   루크는 중얼거리며 손으로 젖은 얼굴을 닦았다. 지난번 그가 여기에 왔을 때는 푸른 하늘에 밝은 해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푸른 하늘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고 잿빛 구름으로 온통 뒤덮인 곳에서 물만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숲도 산도 자욱한 안개에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에릭이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이건 비라고 하는 대기의 현상일 거라고 생각해. 과학책에 그렇게 씌어 있어."
   에릭은 그런 다음 추운 듯이 부르르 떨면서 말을 이었다.
   "만일 감기라도 들면 건강 관리자는 우리가 대체 어디서 감기가 들었는지 알려고 할 거야. 자 돌아가자."
   에릭은 루크가 그토록 열심히 푸른 하늘과 초록색 식물에 대해 말해 준 뒤였으므로 지금 눈앞에 펼쳐진 잿빛 경치에 완전히 실망했다.
   이런 것을 보기 위해 일부러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게다가 최고 회의로부터 벌이라도 받게 되면 큰일이라고 에릭은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 루크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에릭은 위로하는 것처럼 말했다.
   "나중에 다시 와보자."
   두 소년은 땅밑 도시로 되돌아갔다. 도중에 루크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토록 기대했었는데......땅위 세계로부터 고스란히 배반당한 기분이었다.
   루크는 에릭과 함께 땅 위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맛보고 싶었던 것이다.
   두 소년은 학교 가방을 두고 갔던 곳으로 돌아오자, 방독 마스크를 벗고 구두를 싼 흙묻은 주머니를 벗었다.
   루크가 말했다.
   "다음에 갈 때 또 필요할 테니까 주머니는 여기에 두고 가기로 하자."
   운좋게도 그들의 흰 제복은 뒤집어 입을 수 있었다. 두 소년은 옷을 뒤집어 입고 터널을 나왔다. 땅 위에 가본 것 같은 흔적은 이미 아무 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두 소년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서로 잘 살펴본 다음 손수건으로 더러워진 얼굴을 북북 문질렀다.
   두 소년은 구급 가방을 어깨에 메고 밝은 불빛 아래로 나왔다. 그리고 언저리를 살피면서 급행 열차 정거장으로 서둘러 갔다.
   루크가 말했다.
   "알겠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한 맹세를 잊으면 안 돼."
   에릭은 빙긋 웃고 말했다.
   "만일 내가 맹세를 어긴다면 땅 위에 내버려져 비참하게 죽게 되어도 괜찮아."
   정거장에서 두 소년은 북쪽으로 향하는 자동 조종 급행 열차를 탔다. 일터에서 돌아오는 여러 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두 소년을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땅밑 도시의 어린이들은 도시 변두리로 놀러 가는 일이 곧잘 있었기 때문이다.
   스피커에서 소식을 전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지난번 지진으로 전력이 떨어져 불을 끄는 사이렌 시간이 당겨집니다. 이것은 16일부터 얼마 동안 실시됩니다. 그 결과 그 동안 밤은 13시간이 되겠습니다."
   에릭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흥 하고 코방귀를 뀌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는 놀 시간이라는 것이 모두 없어져 버리쟎아....... 앗 여기서 내려야 해!"
   에릭은 깜짝 놀란 듯이 말했다.
   "루크, 그럼 내일 또 만나자."
   열차에서 내린 에릭의 뒤에 대고 루크가 말했다.
   "제복을 로봇 세탁기에 넣는 거 잊지 마."
   "그래 안 잊어. 만일 맹세를 잊거든......."
   에릭은 뒤돌아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곧 움직이는 보도에 뛰어올랐다. 움직이는 보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를 시내 큰 길로 실어 갔다.
  

   에릭네 가족

  
   에릭은 움직이는 보도를 타고 집이 있는 큰길로 향했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 그의 앞에도 타고 뒤에도 타고 있다.
   움직이는 보도는 반대쪽으로 움직이는 것과 나란히 달리고 있다. 타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잡담도 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양쪽에 나란히 늘어서 있는 흰 문 위에 적혀 있는 번호에 끊임없이 주의하고 있다. 어느 집이나 모두 똑같이 만들어져 10미터마다 똑같은 문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자칫 주의를 게을리하다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기 집에서 100미터나 떨어진 곳으로 실려 가고 마는 것이다.
   52-12-146이라는 번호 앞에서 에릭은 건너편의 움직이는 보도로 옮겨 타 자기네 집 문 앞에서 껑충 뛰어내렸다.
  
   에릭은 신분 증명서 역할을 하는 팔찌를 전기 장치로 되어 있는 화면 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문이 쓱 열렸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문은 또 자동으로 닫혔다.
   에릭이 들어간 곳은 작은 방으로 되어 있고 사방에 문이 넷 나 있다. 하나는 지금 들어온 밖으로 나가는 문. 그와 반대쪽에는 가족들이 있는 방으로 이어지는 문. 오른쪽에는 청정실(깨끗이 하는 방)로 이어지는 문이다.
   에릭은 청정실 문을 열고 빨간 살균대 위로 올라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광선이 방사되어 해로운 세균을 모두 죽여 버리는 장치가 되어 있다.
   "오늘은 틀림없이 재미있는 세균이 우글우글 붙어 있을 테니까 죽일 만하겠구나."
  
   에릭은 혼잣말을 하면서 땅 위의 공기에 들어 있는 세균을 생각했다.
   그러자 그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듯이 벽의 빨강 불빛이 켜졌다. 그것은 위생을 관리하고 있는 로봇이 에릭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신호였다.
   방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먼지나 흙이 조금이라도 묻어 있으면 로봇은 다음과 같은 경고를 벽에 나타낸다.
   '곧 몸을 씻을 것.'
   만일 에릭이 그런 경고를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가면 로봇은 곧 그 사실을 최고 회의에 알린다. 그러면 이튿날 최고 회의로부터 검은 표지가 온다. 검은 표지를 여러 개 받으면 땅밑 도시의 제1급 시민이 될 수 없다는 규칙이 있다.
   에릭은 제1급 시민이 되는 것이 소망이다. 제1급 시민이 되면 좀더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직업을 가질 수도 있다.
   에릭은 아직 12살이었지만, 땅밑 도시에 사는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어리더라도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충분히 행하고 있다.
   에릭은 귀찮았지만 하는 수 없이 청정실로 들어갔다. 학교 가방과 비상용 구급 가방을 내려놓자 흙으로 더럽혀져 있는 옷과 구두를 벗어 로봇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샤워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자세히 확인하지도 않고 스위치 판 가운데 하나를 꾹 눌렀다. 그 순간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앗 뜨거, 뜨거......."
   에릭은 형 베르나르가 전용으로 쓰는 샤워 단추를 잘못 누른 것이다. 형 베르나르는 운동 선수여서 에릭과 달리 특별한 샤워를 좋아한다.
   뜨거운 비눗물이 안개처럼 뿜어나오고 그에 이어 이번에는 얼음처럼 찬 물이 쏟아져 나왔다. 에릭은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그것이 끝나자 뜨거운 바람이 그의 몸에 세게 불어닥친다. 에릭은 헉헉 헐떡였고, 너무 뜨거워 얼굴이 벌개졌다.
   에릭은 방문을 열고 로봇이 갖추어 놓은 깨끗한 옷을 입었다. 양치질을 하고 학교 가방의 먼지를 털고 로봇 검사기 앞으로 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초록빛 광선이 쬐어졌다.
   "이러니까 집에 돌아오는 게 귀찮단 말야."
   에릭은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제는 방으로 들어가도 된다는 허락이 내린 셈이다.
   하얀 벽의 네모반듯한 거실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의자 팔걸이에 장치되어 있는 텔레비젼 전화로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에릭을 보자 웃음 띤 얼굴을 돌렸다.
   "어서 오너라."
   에릭은 몸을 굽혀 어머니께 입맞췄다. 그 모습이 상대편 스크린에 비쳤다.
   "어머나 에릭이 돌아왔군요. 그럼 오늘은 이만 끊어요. 내일 또 만나요."
   어머니의 친구는 방글 웃고 텔레비젼 전화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에릭은 거실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아빠도 형도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
   아버지의 의자도 형의 의자도 비어 있었다.
   어머니는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렇단다. 전력 센터에 고장이 생겼다지 뭐냐. 모두들 원인을 알아내는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더라. 조금 전에 아버지께서 전화하셨는데 베르나르도 함께 있다고 하셨어. 여느때보다 늦어지신다는구나."
   에릭이 학교 가방을 플라스틱으로 된 자기의 회전의자에 집어던졌다. 거실에는 가구다와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한쪽 벽이 스크린으로 되어 있는데, 알맞게 꺾여서 방 안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로 할까?"
   그렇게 말하고 어머니는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 왼쪽에 붙어 있는 많은 단추 가운데 하나를 눌렀다. 그러자 바닥에서 흰 식탁이 소리도 없이 튀어나왔다.
   "아버지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뭣 좀 먹는 게 어떻겠니? 오늘은 무얼 먹겠느냐?"
   "뜨거운 것 단 것 빨간 것."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땅밑 도시에서 에릭의 어머니는 마담 6B12라고 불린다. 어머니는 자기 의자에 붙어 있는 투명한 마이크로폰에 대고 음식을 주문했다.
   그러자 곧 에릭의 의자 앞에 있는 전등불이 노란빛으로 바뀌었다. 알았다는 신호다.
   에릭이 단추를 누르자 움직이는 쟁반 위에 컵이 놓여서 나타났다. 컵 안에는 좋은 냄새가 나는 빨간 음료수가 들어 있었다.
   에릭은 그 때 문득, 3시 간식으로 먹는 알약을 먹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이렇게 배가 고픈 것도 당연한 일이다.
   에릭의 어머니는 고대 역사를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인데 오늘도 수업 때문에 몹시 피로한 모양이다. 어머니는 에릭과 똑같은 음료수를 마시더니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에릭이 오늘 어떤 일을 했는지 물었다.
   "예, 나는 루크와 함께 탐험하러 갔어요. 어머니는 루크 15P9를 아시지요? 같은 반 친구 말여요."
   "웅변 대회에서 우승한 소년 말이지?"
   "아니어요. 그는 형인 폴이어요. 그 때 폴이 상으로 무얼 받았는지 아셔요?"
   에릭은 정말로 감탄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다음 주에 폴은 공개 텔레비젼에서 연설하기로 되었어요."
   "어머나 그러냐? 어린아이로서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구나. 폴의 아버지나 어머니께선 이만저만 자랑이 아니겠구나."
   "폴은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어요. 벌써 열 네 살인 걸요. 그리고 폴은 어머니가 안 계셔요. 폴의 아버지라면 엄마도 아실 거여요? 의료 광선 전문가 말여요. 그분이 발명했쟎아요. 아프......아프......뭐라고 했더라?"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아프시론 광선 말이겠지. 그래, 그분이었구나. 그분은 유명한 일류 외과 의사지. 닥터 15P9라고 불리고 있는 분이다."
   자기의 친구가 그런 훌륭한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자 에릭은 기뻤다. 그리고 오늘 오후에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하기가 곤란했으므로 에릭은 일부러 어머니에게 루크의 아버지에 대해 쉴새없이 자꾸만 물었다.
   어머니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분께서 아프시론 광선을 발견해 주셨기 때문에 대부분의 병균을 그 광선에 몇 시간 쬐기만 해도 죽여 버릴 수 있게 되었단다."
   그 때 거실 문 위에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하며 누군가 왔음을 알려 주었다.
   "아버지께서 돌아오셨나 보다."
   어머니는 기쁜 듯이 말하고 마중하기 위해 일어났다. 아버지가 거실로 들어오자 에릭은 달려가 목에 매달렸다. 땅밑 도시에서 미스터 6B12라고 불리고 있는 아버지는 이 땅밑 도시 슬레얼에선 보기 드물게 키가 컸다.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베르나르가 늦는데 무슨 일이 있나요?"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보구료. 로봇 검사기가 베르나르가 돌아왔다는 것도 알려 주고 있지 않소?"
   과연 신호가 빨강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버지가 계속해서 말했다.
   "아마 샤워를 하고 있나 보오."
   에릭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형도 혼났으면 좋을 텐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얼굴을 마주보고 웃었다. 에릭이 샤워실에서 혼났다는 것을 눈치챘던 것이다.
  
   에릭은 언제나 덤벙대서 곧잘 다른 단추를 눌러 혼나곤 했기 때문이다.
  

   작은 영웅 베르나르

  
   세 식구가 저녁 식사를 하려고 식탁 앞에 앉아 있는데 소리없이 문이 열리더니 한 소년이 거실로 뛰어들어왔다. 까만 눈이 장난스레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별안간 공중제비를 몇 번인가 하고 나서 자기 의자에 앉았다.
   "이제 돌아왔습니다!"
   "어서 온!"
   아버지가 강장제를 주문했다.
   "흰 것 차고 강력한 것."
   어머니가 말했다.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장식품이라는 것이 없어진 것은 좋은 일이어요."
   그녀는 옛날 말을 써서 아이들의 호기심을 일깨우는 것을 언제나 좋아했다. 에릭이 보기좋게 그 덫에 걸려들어 물었다.
   "그 장식품이라는 게 뭐여요?"
   어머니는 자세하게 예를 들어 설명했다.
   "방 안을 꾸미기 위한 것으로 주로 망그러지거나 깨지기 쉬운 물건들이지. 예를 들면 꽃병이라든가 어항이라든가 그런 거란다."
   "그런 건 이 땅밑 도시에선 소용이 없는 걸요. 꽃은 땅 밑에서는 피지 않고, 물고기라는 것을 본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말여요."
   언제나 실제적인 방법으로 생각하는 베르나르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놓을 자리도 없고 말여요. 첫째 귀찮쟎아요."
   땅밑 도시의 생활에 만족해 있는 베르나르는 잘난 체하며 말했다.
   "하지만 얼마나 아름답겠느냐?"
   어머니는 세계가 멸망하기 전 땅 위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누렸던 생활을 이것저것 상상하면서 말했다.
   (그 시대의 어머니들은 전기솥이니 믹서니 하는 이상한 도구를 써서 하루에 세 번 식사를 준비했다고 하는데 정말로 즐거워하며 했을까......?)
   조금 뒤 거실에 있는 네 식구는 땅밑 도시의 조리부에서 갖추어 주는 저녁 식사용 알약을 먹었다. 그것으로 저녁 식사는 끝나는 것이다. 식사가 끝난 뒤 디저트만은 모두가 저마다 좋아하는 것을 주문할 수 있다.
   에릭은 초콜릿 맛이 나는 딱딱한 디저트를 주문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합성 과일을, 베르나르는 사탕과자를 2개 주문했다.
   베르나르의 사탕과자에는 조리부에서 보낸 쪽지가 붙어 있었다.
   '베르나르는 사탕과자 2개씩 6일 동안에 여섯 번 주문했다. 이것은 규칙에 어긋난다. 다음 6일 동안 또다시 똑같은 주문을 했을 때에는 벌점을 받게 된다.'
   베르나르가 불평했다.
   "에이 지겨워. 나는 앞으로도 내가 좋아하는 걸 주문할 거야."
   어머니는 얼굴을 찡그리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베르나르, 조심해라. 너는 이 달에는 벌써 검은 벌점을 3개나 받았쟎느냐. 하나는 수학 선생님으로부터, 나머지 둘은 급행 열차에서 떠들었다는 벌이고."
   그러자 아버지가 타일렀다.
   "그런 하찮은 일로 장래를 그르쳐서는 안 된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해도 절대로 우습게 여겨서는 안 돼. 베르나르, 너는 제1급 시민이 될 자격을 잃게 될지도 모르니까."
   아버지는 아들의 흥분하기 쉬운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언제나 베르나르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고 했다.
   좁은 땅밑 도시에서의 거친 행동은 곧 사회의 규율을 깨뜨리는 것으로 오해받기 쉬웠다.
   아버지가 다정하게 말했다.
   "너는 전력 센터에서는 언제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지 않느냐. 그 좋은 기록을 하찮은 일로 헛되이 해선 안 되지."
   형을 좋아하는 에릭은 베르나르를 돕기 위해 얼른 말을 돌려 물었다.
   "아빠, 형이 전력 센터에서 무슨 좋은 일을 했어요?"
   무슨 일에나 흥분하기 쉬운 베르나르는 아버지가 눈짓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른 나서서 말했다.
   "나는 전력이 어떤 이유로 약해졌는지 탐지기로 알아내려 하고 있어."
   어머니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말했다.
   "하지만 위험하지 않느냐?"
   베르나르가 우쭐해서 말했다.
   "위험하지 않아요. 위험한 일이 있을 것 같을 때에는 파일럿 램프가 켜지게 되어 있는 걸요."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설명쯤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앉더니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어린아이에게 그런 일을 시켜 놓고 어른들은 대체 무얼 하는 거지요?"
   베르나르는 모두를 감탄케 할 수 있는 이런 좋은 기회를 행여 놓칠세라 얼른 말했다.
   "어른들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큼직한 파이프 관 입구에 모여서요."
   그 말은 어머니에게 심한 충격을 주었다. 어머니는 다짜고짜 아버지 쪽으로 돌아앉으며 말했다.
   "정말로 그런가요? 이 아이를 정말로 밀폐되어 있는 파이프 관 속에 들여보냈나요? 벌써 몇백 년이나 아무도 들어간 일이 없는 파이프 관에 말여요?"
   어머니는 따져 묻는 것처럼 아버지에게 손가락을 들이대고 격한 투로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당신은 베르나르가 그런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을 잠자코 보기만 하셨단 말인가요?"
   기사인 아버지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글쎄, 흥분하지 말고 들어 봐요."
   아버지는 베르나르가 한 일을 이렇게 빨리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파이프 관은 무척 좁아서 어린아이가 아니면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소. 발전기는 이미 몇 세기 동안이나 밀폐되어 있고 끝없이 움직이는 것으로 여겨져 왔소. 그런데 얼마 전에 지진이 있은 뒤로 전력이 몹시 약해지고 말았소. 전력 센터의 전자 계산기는 위험 신호를 나타내고 있소. 그리고 고장은 발전기 자체가 아니라 어딘지 딴 곳이라는 것을 알아냈소. 아마 어딘가에서 누전인 된 모양이오. 곧 탐지기로 조사해서 조금이라도 빨리 수리해야만 하오."
   베르나르는 아버지를 난처한 처지에 몰아넣은 것을 몹시 미안해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곧 전력이 끊어져 버리고 말아요."
   어머니가 파랗게 질려서 말했다.
   "정말이겠지요?"
   어머니는 너무 무서워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마치 아들에게 사형 선고라도 내린 것처럼 여겨졌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엄한 얼굴로 지켜보며 말했다.
  
   "베르나르의 말이 맞소. 그런 처지이기 때문에 당신도 베르나르를 막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소."
   "하지만 다른 사람도 있을 텐데 어째서 베르나르에게 그런 일을 시켰느냐 말여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소. 우선 몸이 단단히 단련되어 있는 소년이어야 하오. 그리고 전기에 대해 아는 사람이어야 하오. 베르나르는 어릴 때부터 전력 센터에 자주 드나들어 전기에 대해 잘 알고 있소. 쉬는 날까지도 그 곳으로 가 여러 가지 질문을 했을 정도였으니까."
   아버지는 베르나르에게 나무라는 듯한 눈길을 보내면서 말했다.
   "네 어머니한테는 되도록이면 늦게 알리려고 생각했었다. 필요 이상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
   베르나르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매달리며 말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셔요. 나는 충분히 조심하겠다고 약속드릴께요. 위험한 일은 조금도 없어요. 그리고 나는 1분마다 보고하는 걸요."
   "보고? 대체 그건 무슨 말이냐?"
   아버지가 대신 설명해 주었다.
   "파이프 관 속에 있는 베르나르와는 무전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소. 기사장이 베르나르가 나아가는 방향을 정하고, 레이다로 쉴새없이 뒤를 쫓으면서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고 있소."
   "그것만이 아니어요. 나는 나아가는 도중에도 계속 표시를 해가니까 절대로 길을 잃어버릴 걱정은 없어요."
   에릭이 문득 루크 생각이 나서 말했다.
   "속은 캄캄하겠지?"
   땅 위로 나가는 터널도 정말 캄캄했다. 그러나 그것과 다른 것은 베르나르는 그 캄캄한 파이프 관 속에서 영웅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 걱정스러운 얼굴인 어머니에게 베르나르가 말했다.
   "물론 나는 방독 마스크와 광선 헬멧을 쓰고 가지요."
   "그럼, 마찬가지쟎아!"
   에릭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난 뒤 아차! 했다. 형 베르나르는 깜짝 놀란 듯이 에릭을 보고 물었다.
   "마찬가지라니, 무슨 소리야?"
   에릭은 피식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말했다.
   "아니야. 형은 진짜로 쓰는 것이지, 우리들처럼 장난으로 쓰고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야."
   "그야 그렇지! 나는 진짜로 열심히 하고 있는 거야. 그렇지요, 아버지?"
   "그렇다마다! 베르나르는 훌륭한 임무를 다하고 있는 거란다. 위험에 빠져 있는 우리 땅밑 도시를 구하려고 하는 일이야."
   아버지는 어머니와 에릭에게로 돌아앉으며 말을 이었다.
   "이 일은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어머니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에릭은....... 에릭 알겠느냐?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 설사 둘도 없이 친한 친구라도 말이다."
   그런 다음 아버지는 팔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숙제를 해야겠지?"
   베르나르는 구원을 청하는 것 같은 마음으로 말했다.
   "아버지, 나는 그런 일을 했으니까 좀 쉬어도 되겠지요?"
   아버지는 갑자기 엄한 투로 말했다.
   "아니, 안 된다. 너는 시민으로서 할 일을 두 시간 더 했을 뿐이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
   보기좋게 기대가 어긋나 멍해져 버린 베르나르를 보자 어머니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어머니는 베르나르에게 입을 맞춰 주고 문 쪽으로 밀면서 말했다.
   "너는 또 청정실에 학교 가방을 두고 왔구나. 자, 얼른 가서 가져오너라. 네 방에 가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공부해야 한다. 에릭, 너도 숙제해야지."
   에릭은 본디부터 공부를 좋아했기 때문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학교 가방을 집어들었다.
   베르나르와 에릭은 자기들 방으로 들어가자 숙제하는 테이프를 기계에 걸어 놓고 책상 앞에 앉아 스크린을 보면서 열심히 숙제를 시작했다.
   공부가 끝나자 두 소년은 아버지 어머니에게 밤인사를 하고 저마다 자기 침실로 가 침대에 누웠다.
   두 소년은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날 밤 그들은 같은 꿈을 꾸었다.
   베르나르와 에릭은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오솔길을 광선 헬멧의 불빛을 따라 용기를 내어 계속 걸어가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폴의 학교 생활

  
   이튿날 아침 8시에 학교 체육실에서 베르나르는 주장인 폴 15P9를 만났다.
   두 소년은 체육실의 탈의장 의자에 나란히 앉자 로봇 볼 게임용의 가벼운 고무신으로 바꾸어 신었다.
   베르나르는 폴을 팔꿈치로 살짝 밀며 말했다.
   "이번의 네 연설은 틀림없이 크게 성공할 거야. 순식간에 네 이름이 모두에게 알려질 거야."
   "하지만 나는 워낙 태평하쟎니. 잘 될지 어떨지 몰라."
   베르나르가 한 마디 더했다.
   "최고 회의 사람들도 네 연설을 들을 모양이더라."
   그러자 폴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벌써 오래 전부터 준비를 하여야만 했어. 그런데 아직 나는 시민들에게 흥미를 갖게 할 만한 이야기를 생각해 내지도 못했어."
   베르나르는 빨간 타이츠에 음파 벨트를 감다가 폴을 뒤돌아보며 싱긋 웃고 말했다.
   "식사 뒤에 나오는 디저트가 덜 달더라고 하면 어떻겠니? 그리고 식사 서비스가 전보다 형편 없어졌다고 말이야."
   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초음파 호루루기를 입에 가져다 댔다. 소리가 나지 않는 그 호루루기는 그의 팀에 들어 있는 선수들의 음파 벨트에만 신호를 주게 되어 있었다.
   폴이 한 손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빨강색과 파랑색 운동복을 입은 두 팀의 선수들이 체육실 한가운데 모여 저마다의 주장을 중심으로 둥근 원을 그렸다. 폴은 빨강팀의 주장이다.
   어느 선수나 모두 똑같아서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땅밑 도시 슬레얼에서는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는 어떤 아이나 꽤 닮아 있다.
   그것은 먹는 음식이 전부 같은데다 위생 관리부에서 계속 주의하여 보다가 조금이라도 달라진 점이 있으면 곧 고쳐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키도, 몸무게도 모두 같아진다. 꼭 한 가지 다른 것이라면 눈빛뿐이다.
   땅밑 도시에서는 머리칼은 아무도 나 있지 않다. 벌써 여러 세기 전에 털이니 머리칼이니 하는 비위생적인 것은 없애 버렸다.
   그러므로 남자나 여자나 어린아이들까지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머리가 반들반들했다.
   폴은 조그만 구멍이 숱하게 나 있는 은으로 된 작은 원반을 높이 쳐들며 말했다.
   "체육부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오늘의 게임 예상은 다음과 같다고 하셨어. 전자 계산기로 계산한 결과 35점 대 16점. 로봇의 점수는 39점이래."
   모두 와아 하고 소리질렀다. 전자 계산기의 결과는 점수를 예상할 뿐 어느 팀이 이길 것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과연 어느 팀이 35점을 올릴 것인가? 빨강팀일까? 파랑팀일까? 로봇의 점수가 39점이라는 것은 너무 많지 않을까?
   그러나 전자 계산기의 예상이 반드시 들어맞는다고 할 수는 없다.
   "꼭 이길 테다!"
   양쪽 팀은 모두 이렇게 외치면서 경기실로 뛰어들어갔다. 그 곳은 네모반듯한 방인데 마룻바닥과 천장은 하얗게 칠해져 있고, 벽은 빨강과 파랑칠이 번갈아가며 칠해져 있다.
   폴은 은 원반을 문 옆 널빤지로 되어 있는 장치에 끼웠다. 그러자 벽 한 군데가 홱 열리며 가볍고 탁탁 튀는 노랑 공이 굴러나와 폴의 발치에서 멈췄다.
   폴이 그 공을 건드리려 하자 공은 갑자기 천장까지 튀어 올랐다가 정확하게 한가운데 떨어져 멈췄다. 이것은 로봇이 전파를 보내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좋아, 아주 좋은 자리에서 멈췄어!"
   선수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하고는 정해진 위치로 갔다.
   호루루기 소리가 울리고 게임이 시작되었다.
  
   득점은 로봇이 조종하는 공을 빼앗아 상대 팀의 벽에 부딪치면 1점을 얻게 되며 많이 부딪친 편이 이기는 것이다. 공이 벽에 부딪칠 때마다 그 벽에 반짝 불이 켜지며 종이 울린다. 득점은 자동적으로 스크린에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이 경기가 어려운 것은 공을 천장에 닿게 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천장에 닿으면 그것은 공을 전파로 움직이고 있는 로봇의 득점이 된다.
   로봇도 꽤 약아서 언제나 천장 가까이 공을 올리려고 한다. 그것을 선수들은 막아야만 했다.
   시합이 시작되었다. 옆에서 보면 마치 그들이 춤을 추는 것 같다. 파란색과 빨강색 타이츠가 어지럽게 왔다갔다 하며 벽에 환하게 불이 켜지고 득점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노랑 공은 저리로 날아갔는가 하면 어느 틈에 이리로 튀어 선수들은 저마다의 주장이 불어 대는 소리나지 않는 호루루기의 신호에 따라서 재빠르게 뛰어다닌다.
   선수는 결코 말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만일 소리를 내면 상대 팀에게 1점을 주게 된다.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이 엄한 규칙은 땅밑 도시의 소년들에게 자기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아는 힘을 길러 주기 위한 것이다.
   쉬는 시간이 되면 공은 천천히 바닥을 구르다가 멈춘다. 그 쉬는 동안만은 서로 이야기를 해도 된다. 선수들은 바닥에 앉아 팔다리를 마음껏 뻗고 쉰다.
   베르나르가 분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가 지고 있어. 파랑팀에 6점이나 지고 있어."
   그러자 주장인 폴이 말했다.
   "하지만 로봇의 점수는 아직 10점이었어."
   상대 팀과 싸우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로봇이 점수를 버는 것을 막는 것도 볼 만했다.
   폴이 주장답게 선수들을 격려했다.
   "전자 계산기의 예상을 세 번 뒤집으면 흰 벨트를 받을 수 있으니까. 힘내어 잘 하자."
   호루루기가 울렸다.
   공이 베르나르의 코 앞으로 휙 날아오더니 곧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달아났다.
   "이게 그냥!"
   베르나르가 쫓아가려고 하자 폴이 붙잡았다.
   "베르나르, 조심해! 지금의 그 공은 속임수야. 네 자제력을 없애려는 거야."
   폴은 과연 주장인 만큼 로봇의 속셈을 다 알아차리고 있었다.
   두 번째 호루루기가 울리자 드디어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시합이 시작되기만 하면 한 마디도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시합은 빨강팀 27점, 파랑팀 14점, 로봇이 35점을 얻고 끝났다.
   선수들은 시합장에서 나와 모두 청정실로 들어갔다. 주장인 폴은 뒤에 남아 선수들이 타이츠와 고무신을 어김없이 로봇 세탁기에 넣었는지를 확인했다. 한편 베르나르는 음파 벨트를 모아 한 곳에 넣었다.
   선수들은 베르나르의 옆을 지날 때 등을 두드려 주며 말했다.
   "베르나르, 오늘은 참 잘했어."
   "아주 잘 막았어!"
   저마다 한 마디씩 던지고 간다.
   베르나르는 흥분을 잘하는 성격이므로 주장인 폴에게 곧잘 주의를 듣곤 했다.
   "경기를 할 때에는 침착하게 해. 그렇게 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어."
   오늘은 화를 내지 않았던 것이 좋았는지 모른다고 베르나르는 생각했다.
   베르나르는 차례가 되어 샤워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끝내고 완전히 기운찬 모습이 되어 나왔다.
   "폴, 샤워를 알맞게 조절해 두었으니까 단추를 누르기만 하면 돼."
   "응, 고마와."
   폴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채 1초도 되기 전에 비명을 지르며 샤워실 안을 뛰어다녔다.
   베르나르는 샤워를 할 때, 언제나 몹시 뜨거운 물을 틀고 다음에는 찬 물을 끼얹는 버릇이 있다.
   그것을 시치미 뚝 메고 폴에게 권한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폴이 샤워실에서 뛰쳐나왔을 때에는 이미 베르나르는 자기의 옷을 끌어안고 달아난 뒤였다.
   삶아 놓은 문어처럼 뻘겋게 익은 폴은 주먹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나 소용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화학 시간이다. 폴은 텔레비젼 스크린 맨 앞줄로 가서 앉아 필기하면서 비스타폰 테이프에 녹화와 녹음을 하고 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운동화와 동굴 탐험용 구두를 만드는 방법은 저마다 달라서 여섯 단위로 나누어져 있다......."
   선생님의 모습은 아무 데도 없다.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 목소리는 지금 학생들 앞에 있는 스크린에 비치고 있는 실험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것이 끝나자 실험실에서 학생들이 어떤 실험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시를 했다.
   조금 뒤 쉬는 시간이 되었다. 폴은 문께에 서서 학생들이 교실에서 줄줄이 나가는 것을 기다렸다. 아무도 없게 되자 그는 팔목시계에 붙어 있는 무전 장치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값비싼 것이므로 땅밑 도시에서 이것을 갖고 있는 사람은 불과 몇 명뿐이었다.
   훌륭한 의사인 폴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없는 두 아들, 폴과 루크에게 그 기계를 하나씩 주어 언제라도 자기와 연락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때 팔목시계에 붙어 있는 무전 장치가 희미한 소리를 내며 아버지로부터의 호출을 전했다. 아버지는 여느때나 마찬가지로 용건만 간단히 전했다.
   "폴, 아빠는 오늘 밤 돌아갈 수 없겠구나. 그러니 루크를 잘 돌봐 주도록 해라. 알겠느냐? 그럼 부탁한다."
   폴은 곧 음파의 파장을 조절하여 동생을 불러 냈다. 곧 루크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작은 목소리로 말해 줘, 형. 지금 동굴 탐험에 대한 수업을 받는 중이니까......."
   "응, 알았어. 아빠는 오늘 밤 돌아오시지 못한대나 봐. 이따 오후에 동굴로 헤엄치러 가지 않을래?"
   형의 말에 루크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아까부터 마음속의 좀더 깊고 좀더 강한 목소리가 그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땅 위로부터 들려 오는 목소리였다.
   "형, 고마와. 하지만 오늘은 안 되겠어......."
   그런 다음 형이 이유를 물을까 봐 루크는 얼른 덧붙여 말했다.
   "저어, 형 지질학 시험 어땠어?"
   "아주 나쁜 점수였어. 어디든 가서 진기한 광석이라도 발견해 와야지 이러다간 선생님과 좋지 않은 일이 생기겠어. 그렇기 때문에 동굴에 가려는 거야."
   "그럼, 다녀와, 형!"
   "아직 끊지 마. 베르나르가 지금 너희 교실에 있어?"
   폴은 친구인 베르나르가 동굴학 수업을 받으므로 동생 루크와 자주 만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응, 있어. 맨 앞줄에 있어. 그는 가만히 있지 않고 수선을 떨기 때문에 주의 신호가 내내 켜져 있어. 좀더 조심하지 않으면 검은 벌점을 한아름 받게 될 거야."
   "내가 베르나르를 깜짝 놀라게 할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 줘. 아주 기막힌 거야."
   갑자기 폴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에 루크는 당황해서 스위치를 끊고 텔레비젼 스크린에 주의를 돌렸다. 스크린에는 땅밑 도시 슬레얼 교외에 있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미로와 같은 동굴 속이 비쳐지고 있었다.
   한편 폴은 동생 루크가 함께 가지 않겠다고 했으므로 곧 몇몇 친구들과 동굴에 갈 약속을 했다. 그리고 거기에 간 김에 검은 호수에서 헤엄치기로 친구들과 약속했다.
   오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폴은 오디오 방에서 한 시간을 보냈다. 그 방에서 폴은 오디오 헬멧을 쓰고, 고대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읽어 주는 책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큰 전쟁으로 세계가 파멸되기 전, 그들의 조상이 땅밑 도시로 가져온 몇백 권의 어린이 책은 그 뒤 녹음 테이프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몇 세기에 걸쳐 어린이들은 그 테이프를 재미있게 들어 왔다.
   그러나, 그런 오래된 옛날 책들은 어려운 것 투성이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하나 가득이어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예를 들면, 공기라든가 고층 건물이라든가, 비라든가......그런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또 그런 책에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지는 일들이 씌어 있다. 하늘을 난다든가, 불을 피운다든가, 눈 덮인 산을 스키를 타고 신나게 미끄러져 내려온다든가......그런 일들은 땅밑 도시에 사는 어린이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밖에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여러 가지 나온다. 넓은 사막, 흐린 하늘, 햇빛이 비치지 않는 울창한 나무숲, 아득한 옛날에 이미 죽어 없어져 버린 동물이라든가, 말을 타고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는 일이라든가, 물고기를 낚는다든가, 사자를 길들이는 일......좀더 작은 일도 얼마든지 있다. 모기에게 물린다는 것이 대체 어떤 일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모기에게 물린다는 말만 나오면 땅밑 도시의 어린이들은 언제나 크게 소리내어 깔깔 웃었다.
   점심때가 되자 폴은 학생 회관에 있는 매점으로 점심 식사용 알약을 받으러 갔다. 다른 학생들도 급히 달려가 알약으로 된 점심 식사를 받아 먹었다.
   폴이 신분 증명서로 쓰이는 팔찌를 기계 앞에 내밀자, 식사를 취급하는 전자 계산기가 점심 식사인 알약을 골라 주었다.
   폴은 오렌지 빛깔의 캡슐을 받아서 꿀꺽 삼켰다. 그러나 기계 앞을 곧 떠나서는 안 된다. 틀림없이 먹었다는 것을 기록해야만 한다. 만일 주어진 음식물을 먹지 않으면 시민의 의무를 게을리했다 하여 벌을 받는다.
   폴은 점심 식사를 끝내고 두 친구와 함께 소용돌이 모양으로 되어 있는 산책장으로 갔다. 시민들은 날마다 거기에 가야만 한다.
   소용돌이 모양, 다시 말해서 나선형으로 되어 있는 그 장소는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것이다. 땅밑 도시 사람들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땅밑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의자에 앉아 생활하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운동 부족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로부터 늙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걷도록 정해져 있었다.
   벽을 따라서 둥글고 큰 길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것은 점점 높아져 간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끝이 없는 나사 모양으로 되어 있다. 맨 꼭대기까지 걸어가면 그 곳의 문을 지나 이번에는 내리막길을 걷도록 되어 있다. 양쪽 벽에는 부드러운 빛깔이 칠해져 있어 어지럽지 않도록 되어 있으며, 차고 신선한 공기가 언제나 마음을 상쾌하게 해준다.
  
   경쾌한 음악이 곳곳마다 흘러나오고, 음악의 속도도 바뀌기 때문이 걷는 사람은 그 음악에 맞추어 걸음을 빠르게도 하고 느리게도 하게끔 되어 있다.
   정해진 거리를 걸어 종점에 닿으면 거기에는 기록용 스크린이 있다.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심장의 고동과 폐의 상태를 조사해야만 한다. 이렇게 해서 건강 관리부에서는 병을 일찍 발견할 수 있게 된다.
   폴과 친구들은 나선 보도를 두 번째 돌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가 어린데다가 체력이 있으므로 어른들보다 훨씬 운동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두 번째에 그들은 서로 떨어져 첫번째에 보아 두었던 아름다운 소녀들과 함께 걷기로 했다. 나선형 보도는 친구를 만들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그들은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께 곧잘 이런 말을 한다.
   "난 오늘 서쪽 나선형 보도에서 누구누구를 만났어요."
   "어디어디서 누구누구를 만났어요."
   "누구와 수영장에서 만났어요......."
   날마다 수영장에 가서 헤엄을 치는 것 또한 건강 관리부에서 정한 규칙이었다.
  
   폴은 동굴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서 자기의 장비를 집어들고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에 늦지 않도록 가장 가까운 역으로 달려갔다. 친구들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함께 북쪽으로 가는 급행 열차를 탔다.
   그들은 모두 철저한 준비를 했다. 어깨에는 구급 가방을 메고, 튼튼한 재료로 만들어진 전기가 통하지 않는 절연체 옷을 입고, 바닥이 고무로 된 장화를 신고 있다. 그리고 광선 헬멧과 튼튼한 밧줄, 얼음 깨는 도끼 등......이런 것들은 동굴 탐험에는 없어서는 안 될 도구이다.
   소년들은 자리에 앉았다. 자동으로 조종되는 급행 열차는 사람이 그다지 살지 않는 지역을 향해 대단한 속력으로 달려갔다.
  

   숲 속의 루크

  
   학교 공부가 끝나자, 루크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땅 위로 가는 위험한 탐험을 떠났다. 날마다 학교만 끝나면 루크는 땅 위로 통하는 터널로 가는 것이 거의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벌써 여러 번 가 보았으므로 언젠가 친구 에릭을 데리고 갔던 터널 출구까지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고 쉽게 갈 수 있었다.
   오늘도 땅 위에 나가 보니, 하늘 가득히 구름은 끼어 있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그는 산중턱에 있는 터널 입구에서 100미터쯤 아래에 있는 울창한 나무숲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늘이 흐려 있는 편이 파랗게 개어 있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놓였다. 해는 강한 햇살을 내리쬐지 않았으나 비가 오지 않으므로 춥지는 않았다. 또 안개가 자욱이 끼어 있었으므로 지평선도 보이지 않았다. 땅밑 도시의 생활에서는 지평선 따위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볼 때마다 루크는 어쩐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오늘은 땅 밑에 사는 소년에게는 적당한 날씨이다.
   루크는 오늘이야말로 터널에서 나가 모험을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루크는 터널에서 나가 험한 언덕길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돌멩이가 발밑에서 굴러떨어졌다. 이렇게 험한 길은 익숙하지 못했으므로 루크는 저도 모르게 몸의 균형을 잃고 언덕 아래까지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당황해서 일어났다. 조금 어지러웠으나 얼른 둘레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자기가 터널 입구에서 보았던 키가 크고 뾰족한 잎이 달려 있는 나무 옆에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나무는 고대의 식물이라는 책에서 배운 '소나무'라는 것과 매우 비슷했다.
   루크는 얼른 얼굴을 만져 보았다. 방독 마스크가 꼭 붙어 있어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다친 데는 없는가 살펴보았다. 땅밑 도시에서는 가파른 곳이라곤 없으므로 넘어져 딩군다는 일은 좀처럼 없다. 물론 동굴을 탐험할 때에는 다르지만, 루크처럼 산기슭까지 굴러떨어지는 경험을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너무나 신기한 일을 겪었기 때문에 루크는 기뻐서 떨어졌을 때의 아픔도 별로 느끼지 못했다.
   위를 올려다보니 터널 입구가 산 옆구리에 뻥 뚫려 있다. 거기서 굴러떨어진 이상 다시 거기까지 올라가야만 한다. 루크는 광선 헬멧을 집어들어 플라스틱 통에 넣고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조금 올라가서는 쉬고, 또 조금 올라가서는 쉬었다. 루크는 새를 보았다. 우짖는 새소리도 신기했지만, 그 빠르게 나는 모습은 정말 놀라왔다. 땅 위는 어디나 조용했다. 땅밑 도시에서는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끊임없이 나기 때문에 땅 위의 고요함이 그야말로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루크가 신고 있는 구두는 탄력 있는 땅바닥을 가볍게 밟았다. 그는 나무 줄기를 만져 보았다. 그러자 손끝에 송진이 검게 묻었다.
   그 때 느닷없이 무시무시한 큰 소리가 들렸으므로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체 땅 위에 누가 살고 있는 것일까? 어떤 위험이 숨어 있단 말인가?
   루크는 본디 넓은 지역에 익숙하지 못했으며, 지금 그 외침 소리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는 갑자기 자기가 터널 입구에서 퍽 먼 곳까지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가 아무도 모르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크는 너무 놀라서 나무 줄기에 등을 기대고 급히 발전기에 기도를 드렸다. 땅 밑 생활을 떠받쳐 주는 그 거대한 기계가 이 세상에서 가장 힘센 것이라고 배워 왔기 때문이다.
   루크는 그 가장 크고 가장 높은 힘에게 기도를 드렸지만 소망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다. 땅 밑에서는 가장 큰 힘을 떨치지만 땅 위에서는 한 소년조차도 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수상한 것이 다가오는 소리는 더욱 분명해졌다. 땅바닥에 낮게 드리운 나뭇가지가 소리를 내고 있다. 그 때 갑자기 털이 북실북실한 크나큰 동물이 튀어나와 자지러지게 놀라고 있는 루크에게 달려들어 그를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기다란 꼬리를 죽어라고 흔들며 뜨뜻한 혓바닥으로 루크의 얼굴을 핥았다. 그는 눈을 감고 지그시 죽음을 기다렸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났는지 알 수 없지만 죽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아무튼 처음에는 몹시 놀랐지만 점점 마음이 가라앉았다.
   루크는 눈을 뜨고 머리를 쳐들었다. 큰 동물은 여전히 루크의 몸을 덮어씌우듯이 짓누르고 헉헉 가쁘게 숨을 내쉬면서 긴 혀를 내밀고 열심히 꼬리를 흔들고 있다.
   "놀라지 마!"
   그 때 루크의 머릿속에 갑자기 그런 말이 전류처럼 전해져 왔다.
   루크는 대답했다.
   "조금도 놀라지 않아."
   아무도 살지 않을 것으로 여겨지는 땅 위인데 그런 대답이 정말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하지만 너는 놀라고 있어. 나는 잘 알아."
   루크는 바로 옆으로 물러나 앉은 큰 동물을 찬찬히 지켜보았다. 틀림없이 그 동물이 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크가 말했다.
   "그럼 너는 내가 이제 놀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구나."
   그러자 어디에서 들리는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루크에게 물었다.
   "대체 너는 어디에 있지? 아무 데도 네 모습은 보이지 않아."
   루크는 코를 울리고 말했다.
   "나는 바로 네 앞에 있쟎아? 너는 장님인가 보지?"
   그렇게 말하고 열심히 꼬리를 흔들어 대는 털북숭이 동물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동물이 바로 눈앞에 있는 자기를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자 가엾어서 견딜 수 없었다.
   루크는 계속해서 물었다.
   "너희들은 많이 있니? 어디에서 살지?"
   갑자기 웃음 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루크는 후닥닥 일어나 적에게 덤빌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아무 데도 적의 모습은 보지지 않았다. 그 대신 그와 비슷한 키와 모습을 한 한 소녀가 갈색 옷을 입고 긴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소녀는 웃음 소리를 내면서 몸을 흔들고 있다.
   "네가 아무리 파크에게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아."
   "하지만 꽤 얌전했어."
   털북숭이 동물은 개였는데, 그 개는 소녀에게로 뛰어가더니 소녀의 손을 열심히 핥기 시작했다. 소녀가 말했다.
   "어머나! 너는 정말 재미있게 생겼구나. 머리칼도 없고 게다가 얼굴에는 가면을 쓰고 말야. 달세계에서 왔니?"
   루크는 너무 놀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말이지 눈이 휘둥그래질 뿐이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땅 위에 대해서 배웠던 것들은 모두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다.
   땅 위는 모두 타버리고, 아무것도 없이 파멸되어 버린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사람이 살아 있지 않은가!
   동물도 있고 사람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기한 일은 루크에게 땅 위는 어쩐지 낯설지 않고 오래 떠나 있던 곳처럼 여겨지는 일이다.
   소녀의 조심성 없는 말에 루크는 난처해졌다. 루크는 다시 네 발 동물에게 돌아서서 공손하게 물었다.
   "당신은 늑대의 가족입니까?"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파크는 개거든."
   소녀가 말하자, 파크는 정말로 그렇다는 것처럼 꼬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네가 오기 전에 나와 개는 서로 이야기했어."
  
   소녀는 고개를 옆으로 저으며 말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너하고 이야기한 사람은 바로 나였어. 우리는 텔레파시(정신과 정신끼리 서로 뜻이 전달되는 것)의 힘으로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은 거야."
   루크는 곧 흥미를 갖고 말했다.
   "그 장치를 좀 보여 줄래?"
   그러자 소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또 킥킥 웃었다.
   "장치라는 건 없어. 내가 생각한 일이 곧 네 머리에 전해지는 거야. 그리고 네가 생각한 일이 곧 또 내게 전해지는 거지. 너는 그것을 알고 있을 거야. 왜냐하면 너는 텔레파시의 능력이 있으니까.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너하고 나는 똑똑히 통신할 수 있어."
  
   루크는 칭찬을 받았으므로 얼굴이 빨개졌다. 이제까지 그런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조금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소녀는 루크와 나란히 풀 위에 앉으며 말했다.
   "게다가 우리는 같은 말을 쓰고 있지 않아. 저마다 다른 말을 쓰고 있으니까......."
   과연 소녀가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말은 이상한 말이어서 루크는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루크는 소녀가 지금 하는 말이 형 폴이 공부하는 고대에서 쓰던 말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행히 두 사람은 텔레파시의 힘으로 말의 다름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서로의 뜻을 통할 수 있었다.
   소녀는 방글방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애거더라고 해. 너는 이름이 뭐니?"
   "나는 루크 15P9라고 해. 이 산 밑에 있는 땅밑 도시 슬레얼에 살고 있어."
   그는 산허리에 뚫려 있는 터널 입구를 가리켰다.
   애거더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나는 산 뒤 기슭에 있는 냇물가에서 살아. 우리 마을은 로레니아라고 해."
   소녀는 신기한 듯이 가까이 다가앉으며 물었다.
   "어째서 그런 마스크를 하고 있어? 그리고 이 숲에서 무얼 하는 거지? 우리 개 파크와 나는 이 언저리에 곧잘 오지만 이제까지 한 번도 너를 본 적이 없어."
   "그럴 수밖에. 나는 오늘 처음으로 산을 내려왔는걸."
   루크는 마스크를 한 것이 땅 위의 공기가 해롭기 때문이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면 소녀가 기분나빠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사람이 만든 공기를 마셔 왔기 때문에 이렇게 마스크를 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너는 집에서 이렇게 멀리 멀어진 곳까지 뭣하러 왔니?"
   "아버지와 오빠가 사냥하러 왔기 때문에 나는 월귤을 따러 왔어."
   소녀는 쭈르르 숲가로 달려가더니 가죽 주머니를 집어들고 급히 되돌아왔다. 그 주머니 속에는 나무 열매가 하나 가득 들어 있었다.
   "이게 월귤이야. 먹어 볼래?"
   루크는 조심스럽게 월귤을 하나 집어 마스크를 치우고 언제나 간식으로 알약을 먹는 것처럼 입 속에 넣었다.
   "자, 좀더 먹어도 괜찮아."
   "아니야, 이젠 됐어. 하나 이상 먹는 것은 좋지 않아."
   애거더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입이 퍼렇게 물이 들 만큼 월귤을 실컷 먹었다.
   그것이 루크의 호기심을 부채질했다. 그는 언제나 무슨 일이고 끝까지 확인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성질이다. 그는 소녀가 먹고 있는 음식에 대해 몹시 궁금했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거니? 너는 그것만 먹고 사니?"
   애거더는 놀란 얼굴로 그를 뚫어지게 보더니 말했다.
   "물론 이것만이 아니야! 우리는 잡은 짐승의 고기도 먹고, 냇물의 물고기도 먹고, 그리고 빵도 먹어."
   루크는 점점 더 알 수 없었다.
   "빵이라는 건 또 뭐지?"
   그러자 애거더는 주머니에서 빵을 꺼내 반으로 잘라 루크에게 주었다. 루크는 그것을 잘 살펴보았다.
   "이거 내 점심이야."
   애거더는 흰 이로 빵을 깨물었다. 루크는 이렇게 많이 먹는 사람을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므로 몸이 탈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었다.
   루크는 모험심이 많았으므로 자기도 똑같이 먹어 보았다. 그리고 나서 물었다.
   "이거 뭘로 만든 거야?"
   "밀가루로 만들었어."
   "밀가루? 어디서 나는데?"
   "밀에서 나지 어디서 나겠어? 뻔한 일 아니니? 넌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런 말을 듣자 루크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당황해서 얼른 딴 질문을 소녀에게 했다.
   "네 머리에 쓴 것은 모자지?"
   애거더는 손을 머리에 올려 뭔가를 찾는 것처럼 더듬거리더니 말했다.
   "나는 모자를 쓰지 않았어."
   그제서야 루크는 역사책에 아득히 먼 옛날의 일이 씌어 있던 것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의 머리에 나 있었다는 머리칼일까?)
   루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신기한 눈으로 애거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밤에 잘 때도 벗지 않니?"
   이 말을 듣자 애거더는 소리를 죽여 킥킥 웃고 나서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 아무리 더워도 벗지 않아."
   "그럼, 무척 덥겠구나."
   루크는 동정하는 마음이 생겼지만 그것보다는 그 장식물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마스크만큼 덥지 않아. 그런데 너는 이 산의 땅 밑에서 산다고 했쟎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야."
   오랜 시간 두 사람은 풀 위에 앉아 이야기했다. 서로의 생활이 다른 점이며 과학이 발달되어 있는 땅밑 도시에 대해서, 그리고 거기서 생활하는 일 등 또 소녀가 사는 로레니아가 얼마나 소박하며 자유로운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루크는 땅밑 도시 사람들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며 이 땅 위가 사람들의 전쟁 때문에 산산이 파괴되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망 밑으로 피해 들어가 거기에 훌륭한 땅밑 도시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루크는 이런 것들을 어렸을 때부터 배웠으므로 자기가 참다운 애국자인 양 땅밑 도시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했다.
   한편 애거더의 이야기는 훨씬 간단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땅 위가 크나큰 재해를 만났고, 그 뒤 무서운 병이 퍼져 사람들이 많이 죽어갔다는 것뿐이었다.
   "가까스로 살아 남은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이 그 황폐해진 땅 위에 집을 지었대. 처음에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이었대나 봐. 그러다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살게 되고 마을도 만들게 되었대.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지만 여럿이 함께 모여 살면 어려움이 닥쳤을 때 서로 도울 수 있어. 병이 나거나 무서운 들짐승이 덮쳐도 막을 수가 있지."
   "너희들이 사는 그런 마을이 몇 개쯤이나 있어?"
   루크는 좀더 자세하게 알고 싶었다. 애거더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우리 마을의 용감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굉장히 멀리까지 간 일이 있대. 여기서부터 훨씬 남쪽에 세 개의 냇물이 함께 모인 데가 있는데 거기에 마을이 있다고 했어. 또 우리 마을 옆을 흐르는 냇물 훨씬 아래쪽에 있는 큰 곶에도 마을이 몇 군데 있다고 해."
   아무튼 두 사람은 말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텔레파시의 힘으로 마음이 서로 통하고 있는 것이니까 모든 것을 서로 똑똑히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를 믿었기 때문에 놀라운 이야기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애거더에게는 땅밑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땅 위로 나가봐야겠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은 것이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째서 이제까지 아무도 땅 위에 나오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니야, 나오려고 한 사람이 둘인가 있었어. 그 사람들은 죽을 고생을 하면서 땅 위로 나올 수 있는 길을 가까스로 만들었어."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
   "처음 사람은 구멍을 팠는데 거기서 물이 쏟아져 나와서 빠져
   죽고 말았대. 땅밑 도시도 일부분이 물에 잠겼었다고 해."
   "틀림없이 냇물 바닥을 팠던 모양이야. 그 다음 사람은 어찌 되었어?"
   "그 다음 사람 때에는 땅밑 도시의 최고 회의 사람들도 그 문제를 잘 생각해 주어서 납으로 만든 튼튼한 문을 열어 주었대. 그리고 그 사람을 내보내 주었대. 그 사람은 눈과 얼음으로 된 벽을 뚫고 나갔는데 땅 위의 공기가 얼음처럼 차가와서 숨을 쉴 수 없었대. 그래서 최고 회의에서는 이 땅 위에 새로운 빙하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생각했어. 도저히 땅 위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겠다고 생각해 버린 거야. 그런 까닭으로 땅 위로 통하는 문은 또다시 굳게 닫혀 버렸다는 거야."
   "참으로 운이 나빴어! 그 사람은 틀림없이 한창 폭풍이 세게 휘몰아치는 겨울에 나왔던 거야. 그 뒤에 땅 위에 나오려 한 사람은 없니?"
   "내가 아는 한에서는 없어."
   "그런데 너는 어떻게 해서 여기에 왔지?"
   "응, 그저 우연한 기회가 있었어!"
   루크는 조심성 있는 소년이었으므로 자기가 굉장한 모험을 해서 땅 위에 왔다는 것을 자랑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나는 우연히 땅 위로 통하는 길을 발견했어. 그런데다가 나는......나는 왠지 누군가에게 자꾸 끌리는 것 같은 마음이 들었어."
   "그것은 틀림없이 내가 너를 부른 것일 거야. 나는 자주 이 언저리에 파크와 함께 오곤 해. 올 때마다 친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지."
   애거더는 마을에 있는 다른 어린이들보다 훨씬 똑똑했고 또 얌전했으므로 거친 장난이나 소란스러운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로 애거더는 아버지나 오빠를 따라 곧잘 사냥하러 가곤 했다.
   아버지나 오빠는 언제나 큰 개 파크가 애거더에게 붙어다니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루크는 역사 시간에 지구에 대해 공부한 일들이 생각나서 물어 보았다.
   "이 숲에는 사자나 호랑이는 없어?"
   애거더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대답했다.
   "그런 것이 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어. 하지만 늑대하고 곰은 있어. 그리고 퓨마가 가끔 나와."
   "무섭지 않아?"
   "조금도 무섭지 않아. 파크가 지켜 주는걸. 파크는 내 천사야."
   루크는 들을수록 재미있고 신기했다.
   "어디에 있는데?"
   "저기, 봐. 저기 있쟎아?"
   "아니, 파크가 아니라 그 천사라는 거 말야."
   "어머나, 천사 말이니? 천사는 물론 눈에 보이지 않아."
   "그럼, 어떻게 너를 지켜 줄 수 있다는 거야?"
   "그건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시기 위해 보내 주셨기 때문이야.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천사를 보내 주셔."
   "그럼, 내게도?"
   "그럼, 물론이지. 너는 나와 똑같은 하나님의 아들인걸. 그건 같은 공기를 마시지 않는다 해도 그래."
   루크는 어떤 사람에게나 친절하다는 마음이 넓은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몹시 감동했다. 그러나 언제나 친구인 에릭이 하는 것처럼 끈질기게 물었다.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어?"
   "그건,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고, 하나님에게 기도드리기 때문이야. 너는 누구에게 기도를 드리니?"
   "그거야 말할 것도 없이 땅 밑의 생명인 발전기에게 드리지. 하지만 그 발전기는 이렇게 땅 위에 있는 내 소원은 들어 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애거더는 루크를 업신여기는 눈으로 지켜보더니 말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일이라도 다 들어 주셔. 아무리 비밀스러운 생각이라 해도 알아 주셔."
   "그렇다면 하나님도 텔레파시의 힘을 가지고 있구나?"
   "이 세상 누구보다도 많이 가지고 계셔. 그리고 네가 어디에 있거나, 무슨 일이거나 다 들어 주셔."
   "하나님을 뭐라고 부르지?"
   "우리 아버지라고 불러."
   "우리 아버지?......아주 좋은 말이다."
   마침 그 때, 루크의 팔목시계에 붙어 있는 장치가 가벼운 소리를 내며 형 폴로부터의 연락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팔목시계를 귀에 가져다 대고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
   "루크, 저녁 사이렌이 울리기 전에 집에 돌아와 있는 것이 좋을 거야."
   루크는 알았다는 표시로 작은 단추를 두 번 눌러 신호했다. 그는 이야기를 해서 자기가 이렇게 멀리까지 와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애거더는 신기한 듯이 팔목시계를 보더니 물었다.
   "어머나, 팔찌에서 소리가 나는구나! 무슨 말을 했니?"
   "형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빨리 집에 돌아오라는 말이야. 하지만 네가 옆에 있어서 이야기를 하지 못했어. 우리 형의 목소리가 들렸어?"
   "응, 똑똑히 들렸어. 그런데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말이었어."
   "내가 하는 말과 같은 말이었어."
   "그렇다면 알 수 없는 게 당연해. 너희 형은 텔레파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루크는 또다시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거 아니니?"
   루크는 바로 지금까지도 자기에게만 그런 능력이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소녀는 그 말을 듣더니 소리를 죽여 킥킥 웃고 말했다.
   "물론이지. 텔레파시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몇 사람 되지 않아. 우리 가족 가운데서도 텔레파시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나뿐이야. 땅밑 도시에는 텔레파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니?"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도 못했어."
   그 때 멀리서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자 파크가 큰소리로 짖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뿔피리를 불고 있는 것이다.
   "사냥꾼들이 돌아왔어. 나는 마중가야 해. 그럼 또 만나자, 루크."
   두 사람은 악수하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헤어졌다. 새로운 친구를 가지게 되었다는 기쁨에 가슴이 뿌듯해지면서......
   루크는 조심스럽게 산을 올라갔다. 뿔피리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루크는 엎드려서 땅을 짚으며 급히 언덕길을 올라가자 얼른 터널 속으로 뛰어들었다.
   캄캄한 터널 속에서 광선 헬멧을 꺼내려다가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손에 붉은색 둥근 돌멩이를 꼭 움켜쥐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언덕을 굴러떨어졌을 때 무심코 잡은 것이리라.
   루크는 그 붉은 돌멩이를 구급 가방에 넣으려 중얼거렸다.
   "이 돌멩이는 형의 지질학 공부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결과는 루크가 생각한 것처럼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루크는 그것이 뒤에 큰 사건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전력 센터

  
   에릭의 형 베르나르가 전력 센터에 가 보니 열 두세 사람의 기사들이 모여 뭔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베르나르가 오는 것을 보자 기사들은 일제히 하던 이야기를 그만두고 그를 보았다. 베르나르는 자기가 중요한 이야기를 방해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급히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 때 기사로 있는 아버지가 나서며 말했다.
   "베르나르, 이리로 오너라. 네가 오기를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말을 듣자 베르나르는 마음속으로 몹시 우쭐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훌륭한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므로 베르나르는 자기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꽤나 중대한 일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거기에 모여 있는 기사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알고 있었다. 곧잘 그 사람들 뒤를 따라다니며 여러 가지 질문을 해서 그들을 곤란하게 만들어 주곤 했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는 땅밑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생명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기계의 구조와 그것을 다루는 방법이 알고 싶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기술자를 존경했고 또 부러워했다. 기사들은 누구나 베르나르를 좋아했다. 그는 운동을 잘하는 소년인만큼 몹시 기운찼고 머리도 썩 좋았다. 게다가 누구의 말도 잘 들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전기가 통하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는 절연복을 내주었다. 그는 이제까지도 그것을 입고 곧잘 굵은 전선이 있는 큰 파이프 관 속에 들어갔다.
   그는 절연복을 입고 광선 헬멧과 마스크를 들고 큼직한 파이프 관의 모형 지도가 있는 곳으로 가서 이제부터 들어갈 곳을 알아보았다. 그 지도는 밀폐되어 있는 거대한 발전기를 중심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전선이 들어 있는 파이프 관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 거대한 발전기는 땅밑 도시의 심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천재적인 조상들이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퍽 오래된 옛날 일로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지금은 어떤 기록에도 똑똑히 남아 있지 않다.
   아무튼 그것은 땅 밑 중심에 있는 거대한 에너지를 언제까지 꺼내어 써도 없어지지 않는 전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땅밑 도시의 온갖 공장과 그 밖의 고압 전류를 공급하고 있다.
   기사장은 모여 있는 기사들 쪽을 돌아보고 그들에게서 받은 보고를 베르나르를 위해 짧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로 시험해 본 결과 큰 발전기의 기전력(전기가 일어나는 힘) 자체에는 조금도 잘못된 점이 없음을 알았다. 그러니까 전력은 전원에서 약해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이 놓였는데 만일 발전기 자체가 고장난 것이라면 땅밑 도시는 이제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력이 도중에서 많이 없어진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만일 지금 상태가 계속되든가 좀더 전력을 많이 잃게 된다면―그래 여러 가지 보고로 미루어 보건대 그런 염려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땅밑 도시는 매우 위급해진다. 낮 시간을 짧게 줄인 것도 그런 이유지. 조금이라도 전기를 아끼려고 그렇게 한 거야. 만일 지금 이 상태가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몇 군데 공장 문을 닫아 버리고 전력을 번갈아 배당하는 할당제로 해야만 하지. 또 급행 열차의 수도 훨씬 줄여야만 하고.
   지금의 상태가 일시적인 것이라고 낙관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또 전력을 잃는 양이 지금보다 줄 거라고 예상할 수 있는 이유 또한 하나도 없다.
   이렇게 된 것이 최근에 일어난 지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땅밑 도시가 이제까지 지진을 겪은 일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기사들의 보고를 모두 조사해 보았다. 또 로켓 탐지기의 보고도 조사한 결과 파이프 관 남쪽과 동쪽 부분은 고장이 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북쪽 구역과 서쪽 구역 일부분이 좀 이상하다."
  
   그 때 계원이 달려오더니 센터에 있는 전자 계산기의 가장 새로운 보고를 기사장에게 내주었다.
   기사장은 곧 그것을 읽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여러분, 어제 이 시간에 조사한 보고서에 비해 확실히 암페어(전류의 세기)가 줄어 있소. 곧 조사를 시작해야겠소."
   그는 베르나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베르나르, 너는 우리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다. 어디가 고장났는지 그것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너뿐이니까."
   베르나르는 자세를 똑바로 고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제부터
   큰 파이프 관에 들어가 조사하려고 하는 서쪽 구역을 담당한 기사가 베르나르에게 그 구역의 지도를 보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붉은 화살표가 되어 있는 곳을 더듬어 가라고 지시했다.
   한 기사가 베르나르의 팔에 전기 검사 장치를 달았다. 이것을 달고 있으면 아주 조금 누전되는 것부터 방사능까지 탐지해 낼 수 있다.
   레이다 계원이 자기의 위치에 앉더니 베르나르를 안심시키기 위해 우스갯소리를 했다.
   "어디고 옆 길로 장난삼아 들어가려 해도 안 된다. 나는 단 1초도 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테니까."
   무전 전문가는 소형 송수신 장치를 시험해 보고 나서 베르나르의 마스크 속에 장치했다. 베르나르는 그 가볍고 투명한 마스크를 썼다. 머리띠처럼 머리에 맨 테에는 공기통이 붙어 있어 6시간 동안 쓸 수 있는 산소를 공급해 준다.
   베르나르는 그것 외에도 4시간 분의 예비 공기통을 주머니에 준비했다.
   "시험해 보겠습니다. 하나 둘 셋......."
   그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들렸다. 마스크를 쓰고 숨쉬기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언제나 몇 초의 시간이 걸렸다. 베르나르의 보고를 전하고 기록하는 일을 맡은 젊은 기술자가 유리로 된 방에서 나오더니 손을 뻗쳐 베르나르와 악수하고 말했다.
   "수신은 간단해. 내가 하는 말도 잘 들리겠지? 테스트해 볼께. 하나, 둘, 셋......."
   "난 또 무슨 색다른 말이라도 하는가 했어."
   베르나르는 놀리듯이 말한 다음 천천히 파이프 관 입구로 걸어갔다.
   "그렇게 뭐든 말해 보고 싶거든 내가 소리를 조절하는 동안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젊은 기사는 스위치를 돌려 베르나르의 목소리가 누구에게나 들리도록 전류의 진폭을 강하게 늘여놓았다.
   베르나르의 목소리는 스피커에서 큰 소리가 되어 귀청이 터지도록 울렸다.
   "머리가 텅 비어 버리고 말 것 같아요. 이거 너무 놀라운데요."
   베르나르의 말에 모두 와아 소리내어 웃었다.
   베르나르의 아버지 조지 6B12는 아무에게도 자기의 마음속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살그머니 아들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는 베르나르가 이제부터 들어가려고 하는 공기 없는 좁은 파이프 관 속에서의 작업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언제 어떤 위험이 덮칠지 모른다. 감전될지도 모르고 방사능을 쐬게 될지도 모른다. 그 밖에 어떤 위험이 찾아올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베르나르는 지금까지 파이프 관에 여섯 번 정도 들어갔었다. 그러나 자기의 책임이 무겁다는 것을 지금 새삼스럽게 느꼈다. 아버지는 여태까지 파이프 관 속의 위험에 대해 주의시켜 주었으나, 베르나르의 임무가 땅밑 도시가 살아 남느냐 멸망하고 마느냐 하는 일이 걸렸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만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어린아이로서는 참으로 견디어 내기 힘든 중요한 일이라오."
   그런 이유로 어머니는 아들 베르나르가 아무것도 모른 채 날마다 큰 모험을 하기 위해 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짓지 않도록 애써 왔다.
   그러나 오늘 베르나르가 파이프 관에 들어가는 것은 다른 날 들어가던 것과는 다르다. 많은 기사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혼자 있게 되었을 때다. 그 때 비로소 베르나르는 자기 자신에게 참된 용기가 있는지 어떤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가 아버지에게 명예를 가져다 주고 또한 기사들의 믿음에 과연 답할 수 있을 것인가?
   바닥에서 1미터쯤 높은 곳―복잡한 스위치 판이 달려 있는 바로 밑에 6개의 주요한 파이프 관이 지나가는 둥그런 입구가 있다. 그 곳은 금고의 벽처럼 두껍고, 굵은 파이프 관이 밀봉되어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또 전류에 고장이 났다거나 방사능의 피해에 대비해서 저마다의 부문을 떼어 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 둥그런 문 하나가 소리도 없이 열렸다. 그러자 속에 지름이 70센티미터쯤 되는 은빛나는 둥그렇고 굵은 파이프 관이 쭉 뻗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지름 70센티미터의 좁은 파이프 관 윗부분에는 사람의 팔만큼 굵은 절연 전선이 지나고 있다. 그 속에는 고압선이 보존 기름에 적셔진 채 들어 있다.
   그 굵은 절연 전선 어딘가에 고장이 난 것으로 보고 그것을 베르나르가 찾아내어 수리하도록 지시된 것이다.
   "갔다 오겠습니다."
   베르나르는 그렇게 말하자 재빠른 몸놀림으로 좁은 파이프 관 속으로 들어갔다.
   베르나르가 들어가자 기사들은 소시지 모양으로 생긴 가방을 뒤에서 보내 주었다. 그 속에는 베르나르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가 들어 있다. 그는 가방에 붙어 있는 긴 끈을 자기 허리띠 장식에 단단히 맸다. 그런 다음 마치 예인선이 작은 거룻배를 끌고 가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7미터쯤 앞으로 나아가자 좁은 파이프 관이 오른쪽으로 구부러졌다. 그 때까지 입구에서 지켜보던 기사들에게 베르나르의 헬멧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베르나르는 엎드린 자세로 엉금엉금 기어서 부지런히 앞으로 나아갔다. 이 언저리는 전에도 들어온 일이 있으므로 잘 알았으며 지난번에 들어왔을 때 분필로 그려 둔 표시도 곧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이 언저리까지 오면 그는 일단 멈추어서 덮쳐오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파이프 관은 좁아서 몸의 방향을 돌릴 수도 없는데다가 머리 바로 위를 달리는 고압선이며 기분나쁠 정도로 조용한 공기에 숨이 막혀 버릴 듯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 주는 사람은 아버지뿐이다.
   베르나르는 용기 있는 소년이었으므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그러자 이것도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어디에 고장이 났는지 꼭 찾아내겠다는 마음이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었다.
   (오늘은 뭔가 다른 것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음 모퉁이에서 찾게 될지도 모르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을까.......)
   베르나르는 차분한 마음을 되찾자 자꾸자꾸 앞으로 나아갔다.
   "여보셔요. 센터에 계신 여러분, 나는 지난번에 맨 마지막으로 표시해 두었던 화살표까지 왔어요. 이제부터 53번 구역으로 들어가려고 해요. 여기까지는 아무런 이상도 보이지 않았어요."
   5분쯤 지나자 그는 또다시 전신을 보냈다.
   "이제부터 4번 구역으로 내려가겠어요. 미스터 9M16이 생각해 낸 사다리를 쓸 거여요."
   미스터 9M16이라고 불리는 기술자는 파이프 관이 3미터쯤 낮은 다른 관으로 똑바로 내려가는 장소에 사용하기 알맞게 특수한 사다리를 생각해 냈다.
  
   고압선이 들어 있는 절연 전선도 그 곳에서 둘로 나누어져 있다. 하나는 수평 파이프 관을 따라서 죽 뻗어 있고, 또 하나는 한 단 밑에 있는 파이프 관에 이어져 있다.
   매끈매끈한 금속으로 되어 있는 파이프 관에는 잡을 만한 곳이 없으므로 그 기술자는 베르나르의 도움을 받아가며 달라붙는 인조 고무 장치를 양 끝에 단 가벼운 금속 사다리를 만들었다.
   이것을 파이프 관 안쪽 금속에 붙이고 사다리를 따라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이것을 다루는 일은 꽤 귀찮은 데다가 연습이 필요했다.
   베르나르는 반듯이 눕자 소시지 모양의 가방을 끌어당겨 사다리를 꺼내 조립했다. 그리고 머리 너머로 밑으로 던졌다.
  
   베르나르는 센터에 보고했다.
   "이제부터 아래로 내려가겠어요."
   센터에 있는 기사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베르나르가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센터에 있는 아버지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만일 베르나르가 다리라도 부러져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된다면 어쩌겠는가? 아무도 거기까지 갈 수는 없다.
   베르나르는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천천히 몸을 밑으로 굽혔다. 몸이 둘로 꺾일 만큼 구부러졌다.
   그는 몸의 탄력을 이용해 두 다리를 뻗어 사다리에 발을 걸쳤다. 그는 직각으로 꺾여 있는 파이프 관을 따라서 17미터쯤 되는 밑의 파이프 관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도중에 그는 두 발을 파이프 관 안쪽 벽에 단단히 버티고 소시지 모양의 가방을 끌어당겼다. 무거운 가방은 밑으로 쿵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그러나 베르나르와 사다리는 그 충격을 견디어 낼 수 있었다.
   센터에서 그 움직임 하나하나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후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밑의 파이프 관으로 내려간 베르나르는 기어가면서 조사를 계속했다. 1미터마다 반드시 누운 자세로 머리 위를 지나고 있는 절연 전선을 꼼꼼히 조사해야 한다.
   그는 분필로 표시를 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늪에 장치한 전력이 새는 것을 찾아내는 탐지기에도 쉴새없이 신경을 썼다.
   입고 있는 작업복이 무릎과 등을 보호해 주지만 두 손은 그대로 드러난 맨손이었다. 맨손으로 만져 보지 않으면 금속으로 되어 있는 파이프 관의 온도가 어떻게 달라져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정해진 시간마다 베르나르는 어김없이 똑같은 보고를 계속해 나갔다.
   "55번 구역......이상 없어요......57번 구역......여기서 왼편으로 구부러져야 할까요? 아니면 곧장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지시해 주셔요."
   레이다 스크린에서 재빨리 이것을 알아내자, 아버지가 마이크로폰을 들고 곧 지시했다.
   "앞으로 10미터쯤 나아가서 오른편으로 돌면 다른 구역에 닿는다. 3미터쯤 낮아져 있는데 거기서 일단 남쪽으로 되돌아와서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나아가도록 해라."
   시간이 천천히 지나간다.......
   베르나르는 마스크 밑에서 식량인 알약을 입에 넣고 꿀컥 삼켰다. 그런 다음 이로 목마름을 없애 주는 캡슐을 셋으로 깨서 마셨다. 이제는 기운도 났고 목마름도 가셨다.
   이윽고 전력 센터에서 지시가 전해졌다
   "주의해서 잘 들어 주기 바란다. 베르나르, 15분쯤 앞으로 나아가면 너는 파이프 관이 서로 교차된 곳에 이르게 된다. 거기서는 방향을 바꿀 수 있으니까 되돌아오도록 해라. 너는 오늘 충분한 작업을 해주었다. 누구도 그 이상의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센터에 모여 있는 기사들은 베르나르를 도와주고 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모두 풀이 죽어 있었다.
   이윽고 베르나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목소리는 너무 먼데다가 지쳐 있어서 약하디약하게 들렸다.
   "새로운 공기통을 지금 갈아 끼웠어요. 아직 다섯 시간은 견딜 수 있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한 시간쯤 더 나아가 보고 싶어요."
   센터에서는 재빨리 의논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의사도 함께 모였다. 의사는 베르나르가 들어가려 할 때에는 일부러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베르나르가 걱정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는 자신의 작업복에 심장의 고동과 혈압을 재는 장치가 되어 있는 줄은 알지 못했다.
   의사는 그런 장치에 나타난 숫자를 읽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베르나르에게 앞으로 한 시간 더 나아갈 것이 허락되었다.
   "베르나르의 건강은 만점이고, 그리고 신경이 아주 강하니까요. 그의 사기를 떨어뜨려서는 안 돼요."
   베르나르의 보고는 어김없이 차례차례 보내져 왔다.
   "70번 구역......별로 이상 없어요......72번 구역......이제부터 왼쪽으로 돌겠어요."
   기사들은 레이다와 마이크로폰 둘레에 모여서 지그시 한곳에 눈길을 못박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
   "85번 구역......아무 이상 없어요......87번 구역......89번 구역 별로 이상 없어요. 여기서 또 왼쪽으로 돌겠어요. 파이프 관은 죽 이어져 있어요. 어디에도 이상이 있는 곳은 보이지 않아요."
   누구나 다 한결같이 후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괴로운 신음 소리가 들려 왔으므로 기사들은 깜짝 놀랐다.
   베르나르의 아버지는 기사장이 들고 있는 마이크로폰을 낚아채듯이 뺏어 들고 다급하게 물었다.
   "베르나르, 무슨 일이냐? 왜 그래?"
   그러자 숨찬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손을 베었어요. 파이프의 금속이 매끄럽지 않고 날카롭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매끄러운 금속으로 되어 있는 파이프 관에 날카롭게 된 부분이 있다니!
   의사가 갑자기 마이크로폰을 움켜쥐고 말했다.
   "베르나르, 손 어디를 베었지? 피가 많이 나느냐? 얼른 대답해 줘!"
   피를 많이 흘린다면 미처 구조도 하기 전에 의식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기사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베르나르의 대답을 기다렸다. 곧 대답이 들려 왔다.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사이여요. 피가 많이 나요."
   놀란 그 목소리에서 모두 베르나르가 당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베르나르, 놀라거나 겁먹지 마라. 대수롭지 않으니까. 잘 들어. 네 오른편 주머니에 구급약통이 들어 있다. 그것을 열면 녹색 튜브가 있으니까 튜브를 꺼내서 끝을 물어뜯어 피가 나오는 상처에 발라라. 그렇게 하면 아픔도 없어지고 피도 멈춘다. 알겠느냐?"
   "예, 튜브가 있어요. 작업복에 온통 피가 묻었는데 빨면 지워지겠지요?"
   긴장되어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람들은 비로소 안심한 표정을 지으면서 저도 모르게 씩 웃었다. 만일 상처가 깊고 심하다면 그런 걱정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약을 발랐어요. 이거 참 좋군요......이제는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기사장이 맨 먼저 침착을 되찾았다. 그는 의사가 꼭 쥐고 있는 마이크로폰을 들고 말했다.
   "베르나르,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둘레를 잘 살펴봐라. 네 손을 벤 날카로운 곳이 어떤 상태인지 자세히 이야기해 주기 바란다."
   "예......비틀려 있는 쇳조각인데 그것이 오른쪽 금속벽 밖에서 쑥 들어와 있어요. 앗!"
   또다시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기사장님! 아버지! 절연 전선이어요, 절연 전선이요."
   베르나르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오직 놀란 목소리가 들려 올 뿐이다. 답답해진 아버지가 마이크로폰을 잡고 외쳤다.
   "베르나르, 아빠 여기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 괜찮아. 얘기해 봐라. 대체 무엇이 있다는 거냐? 어서 말해 다오!"
   베르나르가 대답하는 목소리는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낮았다.
   "절연 전선이 천장에서 밖으로 빠져나갔어요."
   기사장이 마이크로폰에 몸을 내밀듯이 하고 말했다.
   "베르나르, 침착해라! 너는 전력을 잃고 있는 원인을 찾아 주었다. 훌륭한 일이다. 그 둘레를 잘 보고 색다른 점이 있거든 자세히 설명해 주기 바란다!"
   베르나르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보고를 계속했다.
   "절연 전선이 밖으로 사라진 곳 금속벽을 만져 보니 차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똑똑 두드려 보니 텅 빈 소리가 납니다. 틀림없이 벽 바깥쪽은 텅 비어 있을 것으로 생각돼요. 그리고 벽에는......다른 금속관이 박혀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가 이 파이프 관 일부를 네모나게 잘라 냈다가 다시 그 곳을 막은 것 같은 흔적이 있어요. 그래서 날카로운 부분이 생긴 것인가 봐요. 조금만 더 앞으로 나가 보겠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펄쩍 뛰며 소리쳤다.
   "기다려! 그러다가 네 절연복을 찢기면 어쩌려느냐?"
   잠깐 동안 침묵이 계속된 뒤 다시 베르나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나아가 보았지만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음 구역도 아무 데도 이상이 없어요."
   기사장이 질문을 계속했다.
   "네 파일럿 램프는 켜져 있느냐? 그 밖에 전력이 없어지는 부분은 없느냐?"
   "예, 없어요."
   그 때 의사가 눈짓했으므로 베르나르의 아버지는 마이크로폰을 받아 들고 그에게 말했다.
   "베르나르, 이제는 곧 돌아오너라. 가방은 파이프 관이 직각으로 되어 있는 맨 첫 장소에 두고 오너라. 오늘 조사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기사장도 말했다.
   "지시한 그대로 해놓고 곧 돌아오너라. 모두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 시간쯤 지난 뒤 절연복이 피투성이가 된 채 완전히 힘을 다 써버려 지친 베르나르가 기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파이프 관에서 나왔다.
   아버지가 그를 두 팔로 안아올려 의료실로 데려가 뉘었다. 그는 진정제 주사를 맞은 뒤 깊이 잠들었다. 손에는 붕대가 두툼하게 감겨 있었다.
   베르나르가 들것에 실려 집에 닿자, 어머니가 달려나와 여기저기 닥치는대로 입을 맞췄으나 그는 그것조차 알지 못했다.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거기에는 승리를 거둔 흐뭇한 미소가 보일 듯 말듯 떠올라 있었다.
  

   검은 호수에 간 폴

  
   베르나르가 전력 센터의 파이프 관 속으로 들어가 전기가 새고 있는 곳을 힘겹게 찾고 있을 때, 폴은 친구들과 함께 북쪽 변두리 역에 닿았다.
   여느 날이었으므로 아무 데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 휑뎅그렁했다.
   폴과 친구들은 두 편으로 갈라졌다. 한 편은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쪽의 언덕길을 올라가면 석회석으로 된 동굴, 다시 말해서 종유굴에 이른다. 그 동굴은 석순(종유동 바닥에 석회질이 섞인 물방울이 떨어져 단단하게 굳으며 쌓여서 죽순 모양으로 된 것)이며 종유석(종유굴 천장에 석회질 물방울이 고드름 모양으로 길게 매달려 자란 돌 고드름)이 하나 가득 있어 숨바꼭질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놀이터다.
   그 언저리에는 온천물이 솟고 있어 온천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곧잘 찾아왔다.
   폴과 두 친구는 검은 호수의 찬물에서 헤엄치기로 했다. 그 물 속에는 신기한 수중 동굴이 있다.
   폴이 말했다.
   "나는 학기말 시험 숙제로 내준 방해석(천연적으로 만들어진 탄산칼슘 결정) 수집을 다 끝냈어."
   그러자 한 친구가 말했다.
   "그래? 아주 빨리 했구나."
   또 한 친구는 갈라져 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온천물에 목욕을 하려는 건 너무 사치스럽다!"
   그러나 그 친구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 때 이미 그들은 아치형으로 된 길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소리가 아치에 메아리쳐 들려 왔다.
   폴과 함께 간 두 친구는 저마다 멋대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긴 터널 길을 올라갔다.
   그 곳은 옛날 땅밑 도시가 처음 만들어지던 시절에 탐험가들이 무던히 힘들게 올라갔던 길이다. 지금은 길도 훨씬 넓어지고 전등불도 켜져 있지만, 바위를 도려 내어 만든 그 터널에는 처음 무렵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동굴이 땅밑 도시에서 처음 발견된 것은 200년쯤 전이다.
   동굴이 발견된 뒤로 땅밑 도시 슬레얼 사람들의 생활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그 때까지는 모든 것이 인공적인 생활이었는데 그렇지 않게 된 것이다.
   땅밑 도시에서 맨 처음 살게 된 사람들은 땅밑 도시에 동굴이 있을 것이라곤 믿지 않았다. 그러나 도시를 넓히려고 여러 가지로 애쓰는 동안 사람들은 마침내 땅밑 깊숙이 이어져 있는 동굴을 여러 개나 발견했다.
   그 뒤로는 동굴 탐험이 땅밑 도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운동이 되었다.
   땅밑 도시의 지질학자들은 새로 발견된 광물을 실제로 쓸 수 있도록 방법을 생각해 냈다. 탄광이라든가 광산이 여러 군데 생겨나고 거기서 파낸 광물이 자꾸자꾸 땅밑 도시로 운반되어 왔다.
   어떤 곳에서는 무진장이라 해도 좋을 만큼의 유전도 발견되었다. 새로운 과학은 석유에서 연료뿐만이 아니라 인공 식량으로 쓰이는 단백질과 비타민류를 빼내는 데 성공했다.
   땅밑 도시 슬레얼 시민들은 어렸을 때부터 동굴과 광산 등에 대해 알아야만 했으므로 누구나 다 지질학에 대해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폴은 얼마 전 이런 사실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그가 애쓰지 않고 찾아온 흔해빠진 광물은 학교의 선생님은 말할 것도 없고, 누구도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
   폴과 두 친구는 이윽고 바위 속에 만들어진 방에 닿았다. 거기에는 바위벽에 마치 마법의 눈과도 같은 장치가 되어 있어 여기에 오는 사람을 하나하나 그들의 팔찌에서 나오는 전파로 저마다 등록하게 한다.
   또 돌아갈 때에는 그 장치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점검하여, 만일 한 사람이라도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곧 경호원에게 알린다.
   그러면 경호원은 동굴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나 동굴 속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된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곧 출동한다.
   그 방을 나오자, 세 소년은 검은 호수가 있는 넓고 넓은 동굴로 들어갔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여러 번 이 곳에 왔었지만, 올 때마다 그 훌륭한 광경에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 동굴이 굉장히 넓은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땅밑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좁은 곳에 갇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높고 둥근 천장이 마치 거대한 성처럼 솟아 있고 새하얀 종유석이 꽃다발처럼 굴 안을 온통 눈부시게 꾸미고 있다.
   어디서 비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공 광선이 이 훌륭한 커다란 궁전을 대낮처럼 밝게 비추고 있다.
   새하얀 벽과 비슷한 둘레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수정으로 번쩍번쩍 빛났다.
   동굴 바닥은 자잘한 분홍빛 모래로 덮여, 깊고 투명한 물이 가득히 괴어 있는 호수 기슭까지 가파르지 않은 비탈을 이루고 있다. 너무 깊어서 거무스름한 빛으로 보이는, 거울처럼 조용한 물 위 한가운데에 마치 분수가 치솟기라도 하는 것처럼, 새하얀 돌기둥이 번쩍번쩍 빛나면서 천장까지 닿을 듯이 높이 솟아 있다.
   땅밑 도시 슬레얼에 사는 사람들은 곧잘 이 신비로운 곳에 휴식을 위해서 왔다.
   이 끝없이 넓은 동굴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든 소리가 약해져 버린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온다 해도 이곳은 언제나 조용했다.
   호수에서 헤엄치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사람은 모두 젊은 수영 선수들뿐이다. 언제나 인공 광선을 쬐고 있어 살갗이 적동색으로 탄 그들은 쉴새없이 호숫가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다. 땅밑 도시의 어린이들은 아주 어린 갓난아기 때부터 도시에 만들어져 있는 수영장에서 헤엄을 배우게 되어 있으므로, 헤엄을 못 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므로 꼭 감시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폴과 두 친구는 모래 위에 학교 가방을 놓고 옷을 벗었다. 옷 밑에는 언제나 흰 타이즈를 입고 있다.
   셋은 호수로 뛰어들어 물방울 하나도 튕기지 않고 마치 칼로 물을 베는 것처럼 물을 가르며 헤엄쳐 갔다.
   호수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분수 같은 돌기둥이 있는 데까지 헤엄치기 내기를 한 다음 셋은 따뜻한 모래 위에 누웠다.
   한가롭게 모래 위에 누워 인공 광선을 쬐고 있으면 시간이 마치 꿈처럼 지나간다.
   기운찬 한 아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말을 꺼냈다.
   "어떠냐? '석영굴'(규소와 산호의 화합물로 도자기나 유리의 원료이며 마노나 수정도 석영의 하나)에 가지 않겠니?"
   또 한 아이가 일어나 가방을 집어들며 말했다.
   "좋아, 가자!"
   "그런 곳보다 좀더 멀리 갈 생각은 없니?"
   폴은 이렇게 말했지만 두 친구가 찬성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친구가 말했다.
  
   "갈 생각 없어! 왜냐하면 오후에는 할 일이 산더미처럼 있으니까. 학기말 시험에 내기로 되어 있는 수정 사진을 스무 장이나 찍어야 해."
   또 한 친구도 말했다.
   "나는 내일 숙제로 되어 있는 산호를 수집해야 해."
   두 친구는 저마다 변명하고는 부지런히 가버렸다. 폴은 혼자서 지질학 시간에 필요한 광석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중급반의 동굴 탐험 첫째 규칙에 상급생의 허가 없이는 결코 혼자서 탐험하는 것은 안 된다는 규칙이 있다.
   그래서 폴은 몹시 실망했다. 오늘 하려던 동굴 탐험은 다음으로 미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남게 된 폴은 하는 수 없이 시청각 교육의 텔레비젼 공개 프로그램에서 하기로 되어 있는 연설 연습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폴은 검은 호수의 차디찬 물을 바라보며 연설을 위한 좋은 문구가 없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호수 속에 있는 돌기둥께로 헤엄쳐 가서 그 돌기둥 위로 올라가 연설 연습을 시작했다. 그 때 느닷없이 그의 앞을 재빨리 뛰어가더니 물 속으로 텀벙 뛰어든 사람이 있었다.
   폴은 너무 놀라서 저도 모르게 휘청거리며 텀벙 물 속으로 떨어졌다. 물 속에서 보니, 검은 그림자가 물 밑에서 천천히 떠오르더니 큼직한 석순을 뚫고 만들어진 물 속의 다리 쪽으로 사라져 갔다.
   그 물 속의 다리를 어린아이들은 '숨막히는 구멍'이라고 부른다. 굉장히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이 아니면 그 곳을 헤엄쳐 지나가는 것은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폴은 물 위로 떠오르자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돌기둥 둘레를 헤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뛰어든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언제까지 기다려도 그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 언저리에 보이는 사람이라고는 태평하게 물 위에 떠 있는 눈이 파란 소년 하나뿐이다.
   누가 물에 뛰어드는 바람에 놀라서 물에 떨어진 폴은 처음에는 말할 수 없이 화가 치밀었으나 그 사람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으므로 조금 걱정이 됐다.
   그는 그 물 속의 다리 가까이까지 헤엄쳐 가 보았다. 그러나 물 속의 다리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가 봐야겠다는 마음조차 가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흰 바위를 뚫고 만들어져 있는 그 캄캄한 구멍 속에는 아무도 없는 듯싶었다. 폴은 그 가까이 들어가 보았다. 그러자 감시원 한 사람과 딱 마주쳤다. 감시원은 두 사람이 물 속으로 뛰어들었는데 단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은 것을 보고 급히 헤엄쳐 온 것이다.
   감시원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또 한 사람은 나왔느냐?"
   "아니오.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요."
   그러자 눈이 파란 소년이 옆으로 헤엄쳐 오더니 말했다.
   "누굴 찾으시나요?"
   "그래. 누군가가 뛰어들어 '숨막히는 구멍'으로 갔는데 없쟎느냐."
   그 소년은 머뭇거리지도 않고 말했다.
   "아, 예. 그 아이라면 바로 나여요."
   폴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뭐? 너라고?"
   그러자 그 소년은 뻐기며 말했다.
   "왜 그래? 나는 우리 아빠와 함께 자주 이 물 속의 다리를 지나다니는걸."
   감시원이 주의를 주었다.
   "알았어. 그렇지만 너는 오늘 아버지와 함께 오지 않았쟎아. 나는 여기서 헤엄치는 사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그래서 주의를 주겠는데 이제부터는 혼자서 지금과 같은 장난을 하면 안 된다. 알겠니?"
   그 눈이 파란 소년은 얌전하게 대답했다.
   "예, 잘 알겠어요.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겠어요."
   그 아이는 에릭이었다. 에릭은 자기가 일으킨 소동을 퍽 재미있어 하는 모양이었다.
   감시원은 재빨리 헤엄쳐서 가버렸다. 두 소년은 바위 기둥으로 기어올라 우묵한 곳에 걸터앉았다.
   "너는 나를 굉장히 놀라게 했어. 5분 동안에 두 번이나 놀라게 하다니. 정말!"
   "두 번이나요?"
   에릭은 감시원과 폴이 자기를 찾느라고 애쓰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밖에는 별로 놀래 줄 만한 짓을 한 기억이 없었다.
   폴이 말했다.
   "네가 느닷없이 물 속에 뛰어드는 바람에 나는 놀라서 그만 물 속으로 떨어져 버렸쟎아. 게다가 나는 네가 물 위로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물에 빠진 줄로만 생각했으니까 말야."
   에릭은 눈이 동그래져서 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예? 내가 떨어뜨렸나요? 난 조금도 몰랐어요. 나는 그냥 조금 놀라게 해주려고 했을 뿐이어요."
   "정말 놀랐어. 아무튼 너는 나이에 비해서 아주 헤엄을 잘 치는구나. 나는 저 '숨막히는 구멍'을 지나려는 그런 용기는 전혀 없어."
   에릭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폴 형, 우리 아버지는 내 폐가 몹시 튼튼하다고 말해 주셨어요."
   "그래? 그건 그렇고 어떻게 내 이름을 알지?"
   에릭은 부럽다는 표정을 짓고 말했다.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아요. 형은 운동부 주장이고, 그리고 웅변 대회에서 우승을 했쟎아요. 그리고 또 있어요. 형은 루크의 형이쟎아요. 루크는 나와 아주 친해요."
   폴이 멍해져 있는 것도 아랑곳없이 에릭은 계속했다.
   "나는 에릭 6B12여요."
   에릭은 이 유명한 웅변가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주 신났다.
   폴은 에릭이 무척 영리한 소년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면 동생에게 좋은 친구를 가지고 있음을 칭찬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베르나르의 동생이어요. 형은 빨강팀에 들어 있어요."
   폴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나는 베르나르의 일로는 너에게 칭찬해 줄 말이 없어. 그는 샤워를 할 때 찬 것과 몹시 뜨거운 것을 좋아하는 야만스러운 취미를 가지고 있으니까 말야."
   그러자 에릭이 말했다.
   "형은 폴 형에게도 그런 나쁜 장난을 했군요? 나는 자주 당해요."
   이런 말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곧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
   폴이 언저리를 둘러보며 물었다.
   "너는 여기에 혼자 오진 않았을 테지?"
   "예, 그래요. 어머니가 저기 물가에서 책을 읽고 계셔요. 어머니는 쉬실 때에는 곧잘 여기에 오셔요."
   폴은 퍼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너의 어머니는 네가 나와 함께 동굴을 탐험하러 가는 것을 허락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니?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아있으니까. 나는 오늘 안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신기한 광석을 찾아내야 하거든."
   에릭은 기뻐하며 찬성했다. 그래서 두 소년은 물 속으로 뛰어들어 에릭의 어머니가 책을 읽고 있는 물가를 향해 헤엄쳐 갔다.
   에릭의 어머니는 학교 선생님이므로, 폴은 될 수 있는 대로 공손하게 굴며 점잖은 말로 자기를 소개했다. 마담 6B12는 그의 태도며 말씨에 감탄했다.
   폴은 에릭을 데리고 동굴 탐험에 가도 좋겠느냐고 말을 꺼냈다. 그녀는 반대했다. 그러나 폴은 차근차근 설명하며 이해시켰다.
   어머니가 말했다.
   "하지만 에릭은 아무 준비도 없지 않아요?"
   "동굴 입구에 있는 사무소에서 빌면 됩니다."
   폴의 설명을 듣고 어머니는 또 말했다.
   "늦어지지 않겠어요?"
   "아니어요. 곧 끝내고 오겠어요. 찾는 광석을 잘 알고 있고, 장소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어머니는 그래도 걱정스러운 모양이다.
   "하지만 에릭은 동굴 탐험은 처음이어요."
   그러나 중급반 학생인 폴에게는 동굴 탐험이라는 신나는 일에 대해 에릭에게 일러 줄 수 있는 자료가 충분히 있다.
   어머니는 아들 에릭이 정말로 가고 싶은 듯이 눈을 반짝이고 있는 것을 보자 더 이상 막을 수도 없었다. 어머니가 폴에게 말했다.
   "에릭에게 잘 주의해 주어요. 그리고 저녁 식사 때까지는 돌아와야 해요. 에릭, 학교 가방을 잊지 않도록 해라. 네 옷과 함께 여기에 두고 갈 테니까. 절대로 무리해서는 안 된다."
   땅밑 도시의 여자들은 곧잘 동굴을 탐험하러 간다. 그리고 에릭의 어머니도 이따금 가곤 했으므로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았다.
  

   동굴을 탐험하는 두 소년

  
   30분쯤 지났을 때 폴과 에릭은 땅 밑 깊은 곳으로 향하는 험한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나이가 위인 폴은 무거운 탐험 가방을 짊어지고 앞장서고, 나이가 작은 에릭이 뒤를 따라갔다. 에릭은 가벼운 고무 보트와 노를 둘 들고 있다. 사무소에서 빌어 온 것이다.
   두 소년은 기운찬 걸음걸이로 폴이 잘 알고 있는 코스를 걸어 나아갔다. 얼마쯤 지나 모퉁이를 돌자 크리배스(갈라진 바위 틈)에 닿았다. 그 크리배스에 냇물이 큰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폴은 그 바위 틈의 깊은 밑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언제나 아버지하고 내가 탐험을 시작할 때 출발점으로 정해 놓은 자리야."
   폴의 아버지 닥터 15P9는 두 아들을 동굴 탐험에 곧잘 데리고 갔다. 그래서 폴과 루크는 탐험용 고무 보트를 썩 잘 다루었다.
   폴과 루크에게는 옛날 얘기에 나오는 나라와도 같은 동굴 세계를 탐험하는 것이 퍽 즐거웠다.
   크리배스를 흐르는 시커먼 냇물은 캄캄한 속을 잔물결 하나도 일으키지 않고 흐르고 있다. 불빛이라곤 휴대용 전등불뿐이다. 그 불빛에 냇물은 반짝반짝 아름답게 빛났다.
   고무 보트는 물이 급하게 흐르는 곳에서는 마치 지푸라기처럼 떠내려갔다. 위험한 곳은 높은 바위에 흰 열십자 표시가 그려져 있다.
   정밀하게 만들어진 지도가 없었기 때문에 탐험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콤파스와 높고 낮은 것을 재는 고도계에 의지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폴과 에릭은 모퉁이를 돌아 '환상의 평원'이라고 불려지는 곳으로 나왔다. 폴은 그 장소를 잘 알지만 에릭은 처음이었다.
   너무 놀라운 광경에 저도 모르게 환성을 지르는 에릭을, 폴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두 소년의 눈앞에는 바위로 된 광장이 멀리까지 이어져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식물로 가득 덮여 있다. 어느 식물이나 흰 빛이거나 반투명한 빛이다.
   찬바람이 휘익 불어와 흰 식물이 일제히 소리내며 흔들렸다. 그 곳 한가운데를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치였지만 새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쥐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다.
   "폴 형! 이 식물은 어디서 왔을까요?"
   "여러 세기 전에 땅 위에서 가져온 흙에 묻어 온 거겠지. 그것이 뿌리를 내렸을 거야."
   "하지만 새 역사책에는 녹색 식물에 대한 것밖에 나와 있지 않아요."
   "이 식물도 처음에는 틀림없이 녹색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식물이 녹색인 것은 햇빛을 받기 때문인데 여기 식물은 햇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자라쟎아."
   "이 식물이 땅 위에서 온 거라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땅밑 도시 사람들은 땅 위의 공기를 마신 것은 식물뿐만 아니라 뭐든지 위험하다고 배워 왔으므로, 에릭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미리 다 조사해서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가까이 가도 괜찮아. 하기는 맨 처음에 이 '환상의 평원'을 발견한 사람들은 몹시 무서워했다더군. 그 사람들은 틀림없이 방사능을 받은 줄 알고 시내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마음을 굳혔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에게 옮으면 큰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두 소년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어가는 동안 좁은 길로 들어섰다. 천장이 자꾸자꾸 낮아져 두 사람은 탐험 가방과 고무 보트를 앞에 놓고 기어가기로 했다.
   조금 뒤 두 소년은 물렁한 진흙이 있는 곳에 나왔다. 질퍽하고 미끈거리는 감촉 때문에 에릭은 얼굴을 찡그렸다.
   에릭은 어쩐지 갑자기 불안해졌다. 바로 그 때 앞에 있던 보트가 갑자기 없어졌으므로 에릭은 한층 더 마음이 불안해졌다.
   에릭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크게 소리질렀다.
   "폴! 폴 형! 어디 있어요?"
   에릭은 폴이 밑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구덩이에 빠져 죽어 버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이걸 어쩌면 좋지?)
   에릭이 어떻게 할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에릭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뒤를 따라오고 있어?"
   폴의 헬멧에 붙어 있는 불이 에릭의 코앞에 쑥 내밀어졌다. 그 불빛만이 둥실 떠 있고 폴의 몸은 보이지 않는다. 두 소년이 쓴 헬멧 불빛이 마치 맞붙어 싸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서로 부딪쳤다.
   에릭은 무서워서 비명을 질렀다. 그에게 보이는 것은 폴의 헬멧 불빛과 반짝거리는 두 눈뿐이었다.
   폴은 얕은 구멍 밑바닥에 머리부터 처박고 뛰어들어서 온통 진흙을 뒤집어쓴 것이다. 에릭은 그런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폴이 그렇게 된 이유를 가르쳐 주지 않았으므로 에릭이 그것이 유령인 줄 알고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폴이 진흙으로 뒤범벅이 된 새까만 얼굴로 씨익 웃자 흰 이가 반짝반짝 빛났다.
   "어서 나를 따라와. 곧 너도 나처럼 될 거야."
   에릭은 잠깐 망설였으나 한 걸음 내디뎠다.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발이 미끄러지며 진흙 속에 얼굴을 처박아 버렸다.
   폴이 일으켜 주고 불빛을 가까운 땅바닥으로 돌렸다. 그 아래쪽에서 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제부터 너를 밧줄로 아래에 내려 줄께. 그리고 나서 고무 보트를 던져 줄 테니까 그걸 받아서 냇물에 띄워. 배에 올라타거든 휘파람을 두 번 불어. 그러면 내가 탐험 가방을 들고 내려갈 테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폴은 탐험 가방에서 밧줄을 꺼냈다. 익숙한 솜씨로 밧줄을 종유석 모서리에 단단히 잡아매고 한쪽 끝을 고리로 만들었다.
   폴은 그것을 캄캄한 구덩이 밑바닥을 향해 던졌다. 에릭은 갑자기 무서워져서 구덩이 가까이 가 볼 생각도 나지 않았다.
   폴은 자기가 하는 일에 열중해 있었고, 동생 루크는 언제나 뭐든지 잘 해내곤 했으므로 에릭이 무서워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
   에릭은 상상력이 풍부한 소년이지만 자존심도 남 못지 않게 강했다. 그는 지금 꽁무니를 빼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밑바닥을 알 수 없는 구덩이에 떨어져 죽는 것도 무서웠다. 그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깨끗이 죽는 편이 낫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폴은 밧줄을 단단히 누르면서 조금씩 조금씩 내려 주었다.
   "너는 용기가 대단한데! 처음인데도 무섭지 않니? 이제 곧 바닥에 닿을 거다."
   폴의 칭찬에 에릭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두 다리를 물 속에 담근 채 서 있었다.
  
   폴은 밧줄을 바위 모서리에 단단히 붙들어매고 이번에는 고무 보트를 내려 보냈다. 에릭은 이런 탐험이 익숙한 일이 아니어서 고무 보트를 받으려다가 저도 모르게 머리를 부딪쳐 하마터면 물 속에 벌렁 넘어질 뻔했다.
   "왜 그래?"
   폴이 헬멧의 불을 비추면서 위에서 물었다. 에릭은 올려다보며 높이가 5미터쯤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잠깐만요!"
   에릭은 거미줄에 매달린 거미처럼 몸의 균형을 잡으면서 찬 물 속에 발을 복사뼈까지 잠그고 힘들게 고무 보트를 잡았다.
   에릭은 밧줄을 벗기자 가까스로 냇물에 고무 보트를 띄울 수 있었다. 이젠 되었구나 싶어 얼른 고무 보트에 올라탔다.
   그런데 귀찮은 일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고무 보트에 올라타면 휘파람을 두 번 불어야 하는데 그는 전혀 휘파람을 불 줄 몰랐다.
   형 베르나르는 새처럼 잘도 부는데 에릭은 후후 숨결만 나오지 휘파람은 되지 않았다.
   에릭은 죽을 힘을 다해 휘파람을 불어 보았지만 아무리 해도 잘 되지 않았다. 한편 폴은 기다리기가 지루했던지 몸을 내밀어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았다.
   에릭이 고무 보트에 올라탄 것을 알자 폴은 더 이상 휘파람 소리를 기다리지 않고 마치 원숭이처럼 밧줄을 따라 재빠르게 내려왔다.
   그는 무거운 탐험 가방을 짊어지고 노 두 개를 마치 날개처럼 양쪽에 쑥 내민 채 내려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고무 보트에 올라탔다. 그리고 노를 하나 에릭에게 내주었으나 에릭은 그것을 어떻게 쓰는지 알지 못했다.
   폴은 재치 있게 고무 보트를 물흐름에 맞추어 앞으로 저어 나갔다. 두 소년의 뒤에는 밧줄만이 어둠 속에 축 늘어져 있다.
   에릭은 자기가 동굴 탐험을 정말로 기뻐하는 건지 어떤지도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해본 일이 없는 새로운 경험이 마음에 들었다. 에릭은 땅 밑 깊숙이 고무 보트를 저어 나가는 것이 꽤나 즐거운 운동임을 알았다.
   두 소년은 물 속에 가라앉아 있는 동굴을 고무 보트로 건너갔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종유석과 바닥에서 자라 올라온 석순이 서로 맞붙어, 에릭이 언젠가 책에서 본 오래된 큰 사원의 그림처럼 멋진 둥근 기둥을 죽 만들어 놓았다.
   폭포의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낮은 천장에 메아리치며 들려 왔다.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그 소리는 점점 더 높아져 간다. 떨어지는 물이 안개처럼 물보라를 이루어 헬멧 불빛 속에서 일곱 빛 무지개를 만들었다.
   "조심해!"
   폴이 소리치며 조심하도록 몸짓으로 알렸다. 그러나 에릭은 요란하게 떨어지는 물 소리에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전혀 아무 생각도 없는 사이에 에릭은 별안간 회오리바람에 휘말린 것처럼 느꼈고 찬물을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썼다. 숨도 쉴 수 없었다.
   이제는 틀렸나 보다고 여겨졌으나 그는 수영에는 자신 있었으므로 나무 막대기로 내리치는 것처럼 떨어지는 물의 힘을 피하려면 물 속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에릭은 뛰어들 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에릭은 커튼 같은 폭포수 저쪽에 이르러 쉽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에릭은 자기가 고무 보트에 버젓이 앉아 있는 데 놀랐다. 폴이 열심히 노를 저어 준 것이다.
   조금 뒤 터널에 이르렀다.
   바로 조금 전까지도 귀가 멀어 버릴 만큼 폭포 소리가 요란했는데, 그 터널에 들어가자 이번에는 죽음과도 같은 고요함에 휩싸였다.
   에릭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보자 폴은 저도 모르게 껄껄껄 웃어 버리고 말았다.
   "미리 말해 주지 않아서 미안해. 하지만 검은 호수에서 그렇게 골탕먹였으니까 이것으로 피장파장이야."
   "어지간히 물을 뒤집어썼지."
   에릭은 폴을 원망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넌더리가 날 정도로 물을 맞았지만 두 소년의 옷은 방수가 되어 있었으므로 몸은 하나도 젖지 않았다.
   "이제 다 왔어!"
   폴은 고무 보트를 휑뎅그렁한 넓은 장소 입구에 매놓고 급히 바위 위로 올라갔다. 에릭도 혼자 남아 있고 싶지 않았으므로 얼른 뒤따라갔다.
   "이번에는 선생님도 만족하실 거다."
   폴은 피켈로 바위 벽 속에 있는 광맥에서 황동광 한 조각을 파냈다.
   "아무튼 선생님은 흔해빠진 것은 안 된다고 하시거든."
   에릭은 몹시 감탄해서 말했다.
   "그와 같은 광석 견본을 채취해 가는 것은 폴 형이 처음이겠지요?"
   폴은 거짓말을 해서 상대를 속이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솔직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 우리 반의 절반은 벌써 발견했는걸. 하지만 폭포수 밑을 지난 곳에 있는 것을 가져간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이젠 서둘러 돌아가자. 저녁 사이렌이 울리기 전에 집에 돌아가야 하니까."
   돌아오는 길은 훨씬 빨랐다. 밧줄이 늘어져 있는 곳에 닿자 이번에는 에릭은 한 손으로 밧줄을 잡고 폴이 밑에서 받쳐 주었다.
   폴이 조금 멀리 돌아가기는 하지만 진흙탕 길이 아닌 좋은 길을 알고 있다고 하여 두 소년은 그 길로 해서 검은 호수가 있는 넓은 동굴로 돌아왔다.
   두 소년은 고무 보트와 노 두 개, 에릭이 입었던 방수복 등을 사무소에 돌려 주었다. 계원인 폴의 친구가 무거운 탐험 가방은 자기가 학교로 가져다 주겠다고 하여 크게 도움이 되었다.
   폴은 소중한 황동광 조각만을 가지고 돌아오기로 했다. 두 소년은 호수를 헤엄쳐 건너서 저마다 자기 물건이 놓여 있는 곳으로 갔다.
   땅밑 도시 슬레얼에는 도둑이라는 것이 없다. 누구나 이웃 사람같이 지낸다.
   폴과 에릭은 서둘러 '마법의 눈'이 검문하는 곳으로 갔다. 거기에서 기록을 끝내고 자동 조종되는 급행 열차에 올라탔다. 자리에 앉자 그제야 후유 큰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오늘 오후에는 정말로 즐거웠다고 두 소년은 생각에 잠겼다.
   곧잘 멍청해지는 버릇이 있는 에릭은 학교 가방의 뚜껑을 잘 닫는 것을 잊고 있었으므로 어깨에 메려고 하는 순간 속에서 종이쪽지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폴이 몸을 구부려 집어 주었는데, 그 흰 종이에 씌어 있는 글씨를 보자 몹시 감탄했다.
   땅밑 도시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글씨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거......숙제니? 너는 녹음기를 쓰지 않니?"
   "응. 이건 장난삼아 내가 쓴 시여요."
   에릭은 폴에게서 종이를 받아 가방에 넣었다.
   폴은 요즘 세상에 시 같은 낡아빠진 것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몹시 흥미를 느꼈다.
   폴이 에릭에게 부탁했다.
   "어디 좀 보여 줘."
   "좋아한다면 보여 줘도 좋아요. 하지만 별로 좋은 시는 못 돼요."
   에릭은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창문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사이에 폴은 시를 읽었다.
  
   너는 있다.
   너는 언제나 거기에 있다.
   나 또한 거기에 있다.
   그러나 결코 나갈 수는 없다.
   나는 거기에 있다.
   누가 나를 데려내 줄 것인가?
   나는 거기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 무덤이 있으니까.
  
   "에릭, 좋은 시야. 이 시를 나한테 하나 베껴 써 줘. 오늘 모험했던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으니까."
   에릭은 폴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이걸 줄께요. 동굴을 탐험하러 가기 조금 전에 호숫가에서 지은 시여요."
   에릭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이크! 여기서 갈아타야지. 그럼 안녕, 폴 형! 오늘은 정말로 재미있었어요. 고마와요!"
   급행 열차는 정확하게 1분 동안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폴이 창문으로 에릭을 보니 에릭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시를 짓다니 정말 색다른 아이야."
   폴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팔목시계에 달려 있는 무전 장치를 조절하여 동생 루크에게 이제는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니 돌아오라고 연락했다.
   동생에게서는 찰칵찰칵 두 번 회답이 왔다. 알았다는 신호였다. 언제나 비밀을 좋아하는 루크는 별로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폴은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그 녀석은 정말 비밀을 좋아해. 아직도 어려서 그럴까?"
   집에 돌아오자 폴은 무엇보다도 먼저 청정실로 뛰어들어갔다. 그런 다음 거실의 안락의자에 털썩 앉았다.
   아버지가 집에 없을 때에는 폴이 집의 책임자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여러 개의 단추를 눌러 식탁을 준비하고 저녁 식사로 먹을 알약을 주문했다.
   그런 다음 향기 좋은 녹색 강장제를 먹으면서 에릭이 주고 간 바로 얼마 전에 새로 지었다는 시를 읽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우리는 이 쓸쓸한 세계를 빠져나가 보았다.
   나는 수많은 신기함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루크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처음으로 아무도 없는 나라에 가 본 것이다.
   거기에는 햇빛은 없고 온통 안개와 비뿐이었다.
   나는 또 가게 되리라.
   그 곳에서 루크와 함께 눈이 휘둥그래질 것이다.
  
   바로 그 때 문에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하며 루크가 돌아왔음을 알렸다. 폴이 방금 읽은 시가 적힌 종이를 주머니에 넣자마자 텔레비젼 전화의 불이 켜졌다.
   아버지에게서 온 전화였다.
   "나는 불도 켜지지 않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밀폐된 방에서 실험을 하고 있으니까 연락하지 않도록 해다오. 너희들은 둘 다 자기가 하는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잘 해 주기를 바란다. 한 이삼 일 동안은 집에 갈 수 없을 것 같다."
   가족과 실험 사이에 끼여서 의사인 아버지는 이렇게 자주 아이들을 희생시켜야만 했다. 그런 때 그는 죽은 아내를 마음속 깊이 뼈저리게 생각했다. 그러나 땅밑 도시 슬레얼과 같이 갇혀 지내는 사회에서는 어린이들도 자기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 잘 해나갈 수 있다.
   폴과 루크는 아버지와 잠깐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 일 저 일에 대해 의견을 물어 본 다음 저녁 인사를 했다.
   "안녕히 주무셔요."
   "잘 자라."
   두 소년은 얼른 저녁 식사인 알약을 먹었다. 그런 다음 곧 학교 공부를 시작했다.
   겨우 끝냈을 무렵 불이 깜박거렸다. 밤이 되었다는 것을 첫번째로 알리는 신호로 어린이들에게 잠자리에 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폴이 동생에게 말했다.
   "잘 자라."
   그는 오늘 밤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도 함께 해야 한다.
   폴이 침실에서 나가려 하자 루크가 그를 불러 세웠다.
   "형, 좋은 것 줄께."
   루크는 규칙에 따라서 반드시 침대 옆에 두게 되어 있는 구급 가방에 손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나는 형의 지질학 공부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돌멩이를 가져 왔어."
   루크는 붉은 돌멩이를 꺼내 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서 받았다는 말을 절대로 아무에게도 해서는 안 돼. 또 내가 그걸 어디서 가져왔는가 하는 것도 물으면 안 돼."
   폴은 그 묵직한 붉은 돌멩이를 눈이 휘둥그래져서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종류의 돌멩이였다. 폴은 동생이 비밀을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응, 그래. 약속할께. 내 생각을 해 주어서 고맙다. 그럼 잘 자."
   "형, 잠깐만! 그냥 약속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 슬레얼의 맹세를 해야 해."
   "이젠 그럴 시간이 없어."
   폴은 그렇게 말하고 자기 침실로 뛰어갔다. 그 순간 전등불이 일제히 꺼졌다. 불을 끄는 시간이 된 것이다. 큰길의 경비용 불이 몇 군데 켜져 있을 뿐이다.
   자동으로 조종되는 급행 열차도 멈추고, 움직이는 보도도 멈췄다. 땅밑 도시의 모든 집 침실에 가벼운 최면(잠을 자게 하는)용 가스가 보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시민 건강을 위해 베풀어지는 혜택이다. 땅밑 도시에 사는 모든 시민은 반드시 13시간 동안 깊이 잠을 자야만 한다.
  

   휴일의 네 대화

  
   여기는 전력 센터다.
   기사장이 놀라서 말했다.
   "베르나르! 무엇하러 왔느냐? 나는 네가 손을 다쳐서 쉬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베르나르가 웃으며 말했다.
   "기사장님, 난 다 나았어요. 지금 의사에게 다녀오는 길이어요. 선생님은 치료 광선을 쬐어 주셨는데 이제는 분홍빛 흉터가 남아 있을 뿐이어요."
   "그럼 친구들과 휴일을 즐기러 가지 않겠다는 거냐?"
   "예, 가지 않아요. 할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쉬거나 놀러 갈 수 있겠어요."
   기사장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그건 네 말이 맞다. 우리는 하룻밤 내내 그 일에 대해서 의논을 했다."
   베르나르는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나는 틀림없이 좀더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파이프 관이 외부로 연결되어 있는 이유를 좀더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우리도 바로 그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수수께끼를 밝혀 내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지금 찾고 있는 중이란다. 너희 아버지도 전문가들과 함께 지금 여기서 그 수수께끼를 밝히려고 의논하고 있다."
   "하지만......내가 하면 안 될까요? 다시 한번 파이프 관 속에 들어가면 안 될까요?"
   "너는 아직 어리다. 어린 너로서는 지나칠 만큼 충분히 해 주었다. 우리 모두의 생각이 그렇단다."
   베르나르는 열심히 말했다.
   "하지만 기사장님, 그 일에 대한 일이라면 나를 믿어 주셔요. 아버지도 잘 알고 계셔요. 한번 일을 시작하면 끝까지 해야 한다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너의 아버지도 네가 또다시 파이프 관에 들어가는 것은 찬성하지 않으신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일을 훌륭하게 끝내겠다는 나를 막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야 그렇겠지. 너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용기 있는 사람이니까. 너는 무섭지 않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느냐?"
   "그야, 무섭지요!"
   "그럼, 무서운데 어째서 또 들어가겠다는 겨냐? 그걸 알고 싶구나."
   "기사장님, 그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파이프 관 속을 기어갈 때, 나는 시험삼아 내 자신에게 말해 보았어요. 나는 정찰하고 있든 병사다 하고......."
   "그래서?"
   "병사는 가장 중요한 싸움을 앞둔 전날에 달아나거나 하지 않는 법이어요."
   "그렇다면 너는 정찰할 때만 필요한 병사로 끝나기는 싫다는 말이로구나. 좋아. 네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하겠다. 너의 아버지가 찬성하면 준비를 하고 와주기 바란다. 그리고 파이프 관 속에 들어가 북서 구역의 파이프 관에서 외부로 연결되어 있는 곳을 자세히 조사해서 보고해 주면 고맙겠다."
   "예. 그게 바로 제가 하려던 일이어요. 몇 시에 오면 될까요?"
   "10시에 이리로 와다오. 베르나르, 네 손 한번 잡아 보자. 너는 나를 실망하지 않게 해 주었으니까."
   "그럼 기사장님, 나중에 오겠어요. 나는 그 때까지 에릭과 헤엄을 치고 오겠어요."
  
   루크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모르게 땅 위로 나와 친구가 된 애거더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애거더, 왜 울지?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왜 우느냐 말야?"
   "루크, 해님이 눈부시게 빛난다 해도 꼭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어. 나는 이제 다시는 너를 보지 못하게 될 거야."
   "나를 보지 못하게 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는 친구쟎아? 누가 너에게 나하고 만나면 안 된다고 했니?"
   "아니야.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애거더, 자꾸 울지만 말고 얘기해 봐. 대체 무슨 일이야?"
   애거더는 훌쩍거리며 말했다.
   "마을에 무서운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했어. 그 병에 걸리면 누구나 다 죽어."
   "전염병? 그게 뭐지? 늑대니 곰 같은 위험한 동물 말이야?"
   "그렇지 않아, 루크. 동물이라면 아무리 무섭더라도 막을 방법이 있을 거야. 전염병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옮는 무시무시한 병이야. 한 번 걸리면 살아날 수 없어. 벌써 많은 사람이 죽었어."
   "그럼, 고칠 수 없다는 거니?"
   "고칠 아무런 방법이 없어. 3년 전에도 그 병이 퍼졌는데 그 때에는 마을 사람의 3분의 1이 죽었어. 우리 어머니도 그 때 돌아가셨어."
   애거더는 간신히 말을 마치자 또 서럽게 울었다. 루크도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이 되어 위로하듯 말했다.
   "그렇구나. 가엾어라! 나도 어머니가 안 계셔. 너와 똑같아. 집에는 아버지와 형뿐이야."
   "우리 오빠는 아마 내일을 못 넘기고 죽을 거야. 이젠 아무리 불러도 오빠는 아무것도 듣지 못해."
  
   "애거더, 그런데 그 병이라는 것은 증세가 어떻지? 우리 아버지는 의사야."
   "온몸이 열이 많아서 불덩이 같고 여기저기 부어서 물집이 생겨. 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아프고 자꾸만 잠이 와서 눈을 감으면 그대로 깨어나지 못하는 거야. 운좋게 살아난 사람도 반드시 얼굴에 물집 자국이 생기고 평생 동안 없어지지 않아."
   "아주 무서운 병이구나. 나는 아버지의 의학책을 살펴봐야겠어. 그래, 아득한 옛날에 퍼졌던 병 가운데 하나라고 씌어 있던 생각이 나."
   애거더는 절망한 얼굴로 힘없이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손을 쓸 방법이 없어. 루크, 어쩔 수 없어. 정말로 어쩌면 좋지? 벌써 여러 사람이 죽었는걸."
   루크는 안타깝게 물었다.
   "애거더, 그럼 너는? 너도 병에 걸릴 것 같니?"
   "그걸 어떻게 알아? 언제 걸릴지 아무도 모르는 일인걸."
   "왁찐은 없니?"
   "그게 뭔데? 약초 이름이야? 약초도 전혀 듣지 않아. 그 누구도 우리를 구할 수 없어. 루크, 나 이젠 그만 돌아가야 해. 오빠가 나를 자꾸 불러."
   "애거더, 그럼 잘가. 너의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도록 기도할께."
  
   폴의 집에서는 텔레비젼 전화의 불이 켜졌다.
   폴이 수화기를 들었다.
   "폴 15P9, 너는 내가 누군지 알겠지?"
   "예, 알아요. 최고 회의에 계신 분이어요."
   "좋아. 그렇다면 우리 최고 회의는 매우 중대한 용건이라야 전화로 불러 낸다는 사실도 알고 있겠군?"
   "예, 알고 있어요."
   "네 반 지질학 선생님으로부터, 네가 오늘 아침에 숙제로 낸 붉은 돌멩이를 어디서 구했는지 도무지 말을 하지 않는다는 보고가 있었다."
   "나는 정말로 몰라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주었을 뿐이어요."
   "전문가는 그 붉은 돌멩이가 석류석이며, 둥근 모양은 빙하의 작용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석류석은 땅 위의 돌멩이이다. 이 땅밑 도시에 그와 같은 돌멩이가 있다는 것은 아무리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므로 걱정스럽기도 한 일이다.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없겠느냐?"
   "아마도 맨 처음에 이 땅 밑에 온 우리의 선조가 땅 위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 연구실에서 조사한 바로는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틈에 이끼가 있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 이끼는 바로 얼마 전에 햇빛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았다. 만일 이 돌멩이가 땅 위에서 틈새기를 통해 떨어진 것이라면 급히 그 사실을 조사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문제니까. 그러므로 너에게 그 돌멩이를 준 사람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시민으로서의 네 의무라는 걸 잊지 말아라."
   "하지만 그건 할 수 없어요. 말하지 알겠다고 맹세했으니까요."
   "아무튼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 줄 테니까 그 사람을 만나서 어디서 그걸 찾아냈는지 물어 보도록 해라. 알겠느냐?"
   "예.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어요."
   "해보기만 해선 안 돼. 이건 명령이다. 너는 내일 분명하게 조사해서 그 결과를 최고 회의에 나와 보고해야만 한다. 만일 이 보고를 하지 않을 때에는 명령을 어긴 사람으로서 제1급 시민이 될 자격을 잃게 된다. 알겠느냐?"
   "예. 알겠어요."
  
   에릭의 집에서는 어머니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얘야, 에릭. 벌써 열 번도 더 이야기하는 것이다만 네가 시를 썼다는 종이는 아무 데도 없어요."
   "하지만 엄마, 나는 바로 어저께 호숫가에서 시를 썼다니까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찾아야만 해요."
   "에릭, 너는 언제나 멍해 있으니까 그러지 않느냐. 보나마나 틀림없이 큰 실수를 저지를 거다. 두고 봐, 언제고 아주 귀중한 것을 잃어버릴 테니."
   "엄마, 내게는 그 종이가 아주 귀중한 거여요. 무척이나 중요해요. 사느냐 죽느냐 할 만큼 중요하단 말여요."
   "어머나, 무슨 그런 연극 같은 말을 하지. 에릭,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두고 나와 함께 시민 수영장에나 가자. 거기서 베르나르를 만나기로 되어 있쟎니?"
  

   베르나르의 발견

  
   전력 센터에서는 기사들이 스피커를 에워싸고 걱정스럽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 스피커에서는 파이프 관 속에 들어간 베르나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 오고 있다.
   "지금 금속판을 잘라서 열었어요. 절단기가 아주 잘 들어요......."
   기사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몸을 앞으로 내밀듯이 하고 베르나르의 말에 모든 신경을 모으고 있다.
   "금속판 저편은 공간이어요. 엇, 찬 공기가 통하고 있어요."
   그 목소리에 이어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그의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와아! 파이프 관 밖에 딴 터널을 팠어요."
   "뭐라고? 터널?"
   "단단한 바위 속에 말이냐?"
   "아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그런 곳에 터널을!"
   기사들이 저마다 놀라 소리쳤다. 기사장은 조용히 하라고 몸짓으로 말하고 마이크로폰에 대고 말했다.
   "베르나르, 좀더 자세히 말해 다오. 네 말은 모두 듣고 있으니까. 무엇이 보이느냐?"
   "둥그런 터널이 멀리까지 이어져 있어요. 내가 있는 이 파이프 관보다 조금 더 좁은 것 같아요. 파이프 관 절연 전선에 다른 전선을 이어 전류를 딴 곳으로 끌었어요. 그 전선은 다른 터널 속으로 아주 길게 뻗어 있는 것 같아요."
   "베르나르, 되도록 좀더 자세히 말해 다오. 아무리 조그만 일이라도 모두 중요하니까."
   "알겠어요, 기사장님. 바위벽에 판 터널은 울퉁불퉁해요. 밑에는 돌이며 바위 부스러기들이 하나 가득 흩어져 있어요."
   "그 돌 가운데서 하나를 집어 요사이에 판 것인지 어떤지를 좀 알아볼 수 없겠느냐?"
   "어떻게 알아보면 되지요?"
   기사장이 눈짓하자 광산 전문 기사가 마이크로폰을 집어 들었다.
   "베르나르, 잘 들어라. 돌에 네가 갖고 있는 목마름을 없애 주는 캡슐을 열어서 대보아라. 그리고 캡슐의 액체를 완전히 흡수하는데 몇 초가 걸리는지 재어 봐 다오."
   "알겠어요. 지금 돌 두 개를 주워 그것으로 캡슐을 깨려고 하는 참이어요. 이제부터 시작하겠어요. 1초......2초......3초......4초, 4초로 완전히 빨아들이고 말았어요."
   "알았다. 그러면 그 터널은 바로 얼마 전에 판 것이다. 터널 속의 공기가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있으면 좀더 확실히 알겠는데 말이다."
   그 때 최고 회의의 한 지도자가 베르나르가 실험하는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가 얼른 마이크로폰을 잡았다.
   "베르나르, 거기에 떨어져 있는 돌이 혹시 석류석은 아닐까?"
   "석류석이오? 나는...... 나는 지질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르겠어요. 설명해 주시겠어요?"
   "석류석은 둥글고 붉은 빛을 띠고 있다. 아주 단단해서 들어 보면 다른 돌보다 무겁단다."
   "그렇다면 아니어요. 이 돌은 가볍고 회색이어요. 화강암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아니군. 만일 석류석이라면 여러 가지 일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최고 회의 지도자는 단념한 모양으로 마이크로폰을 기사장에게 돌려 주었다.
   기사장은 베르나르에게 물었다.
   "베르나르, 그 터널 속을 조금이라도 좋으니 들어갈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아도 지금 터널에 들어와 3미터쯤 나왔어요."
   얼마나 용감한 소년인가! 기사들은 모두 감탄한 얼굴로 베르나르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걱정되어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어깨에 힘을 주어 똑바로 펴고 있었다.
  
   기사장이 계속해서 질문했다.
   "베르나르, 충분히 주의해야 한다. 전선은 끝없이 뻗어나갔느냐?"
   "예. 죽 뻗쳐 있어요. 터널도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여요. 이 터널을 기어가기는 몹시 힘이 들어요...... 너무 좁아서...... 그리고 바닥이 편편하지도 않으니까요....... 엇, 장갑이 떨어져 있어요? 장갑 한 짝을 발견했어요...... 내 손이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여요."
   "장갑?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 알겠느냐?"
   "예. 이제까지 보지 못한 재료여요. 아주 질기고 말갛게 비칩니다. ......엇 뭔지 번쩍이는 것이 있어요. 자세히 살펴보겠어요."
  
   그러자 그 때 베르나르의 아버지가 더 못참겠다는 듯이 외쳤다.
   "가지 마라. 기다려! 더 나아가면 안 된다.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어."
   "아버지, 걱정하지 마셔요. 난 지금 그 번쩍이는 물건을 집었어요. 구리로 만들어져 있는데 무슨 도구인 듯해요. 공사하는 데 쓰는 도구로 여겨지는 아주 이상하게 생긴 것이어요."
   갑자기 베르나르의 목소리가 겁먹은 소리로 변했다.
   "아버지, 나는...... 나는 여기가 기분나빠요. 아무래도 바로 얼마 전까지 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할까요?"
   기사장이 얼른 마이크로폰을 잡고 말했다.
   "네가 발견한 것들을 가지고 곧 돌아오너라. 금속판을 자른 곳은 다시 단단히 닫아서 막아 놓도록 해라."
   "예, 알겠어요. 기사장님!"
   베르나르는 후유 한숨 들린 듯이 말하고 재빨리 돌아오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모두 제5호 파이프 관 입구에 모여서서 이제나저제나 베르나르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마침내 둥그런 입구로 베르나르의 얼굴이 쑥 나왔다. 눈을 반짝이며 들고 온 물건을 높이 쳐들어 보인다. 그것은 장갑과 이상한 모양의 집게로, 둘 다 땅밑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재료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한 물건으로 미루어 보건대 땅 밑에는 그들 외에도 딴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게 정말일까?
   땅밑 도시 슬레얼에 사는 사람들만이 저 큰 전쟁의 피해로부터 살아 남은 것이 아니라 그 밖에도 살아 남은 사람들이 또 있는 모양이다. 대체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 것일까?
  
   루크, 서둘러 땅 위로 가다
  
   루크는 마치 회오리바람과도 같은 기세로 집으로 뛰어들어왔다. 청정실 로봇 검사기의 등불이 빨강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의 침실 옆방으로 뛰어들었다. 그 곳은 전에는 어머니의 방이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실험실로 쓰여지고 있다. 땅밑 도시에서는 보통 식구들이 쓰고 남는 방은 모두 밀폐시켜 버리도록 되어 있으나 루크의 집은 특별히 쓰도록 허락되었다. 그것은 루크의 아버지가 의학 부문에서 크나큰 공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실험실엔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었지만 루크는 지금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루크는 옛날의 병에 대해서 씌어 있는 의학 책을 있는 대로 꺼냈다. 그리고 애거더가 설명해 준 질병과 비슷한 것이 없는가를 찾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것과 아주 비슷한 병을 찾아냈다. 서둘러 읽어보았다.
   '병명 두창...... 일반적으로 천연두라고 불리고 있다. 전염병의 한가지다.'
   그리고 끝 부분에 큼직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왁찐이 발견된 뒤로는 이 무서운 병도 좀처럼 볼 수 없게 되었다.'
   "옳지, 알았다! 애거더, 내가 곧 가서 구해 줄께."
   선반 위에는 아프시론 광선을 방사하는 의료 기구가 여러 개 놓여 있다.
   루크는 그 가운데서 얼른 긴 네모꼴 상자를 하나 찾아냈다. 그것은 아프시론 광선을 방사하는 작은 기계였다.
   땅밑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1년에 한 번씩 반드시 아프시론 광선기 앞에 서서 광선을 쬐도록 되어 있다.
   아프시론 광선은 어떤 세균이라도 그 자리에서 죽이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한 번 쬐면 몇 개월 동안 어떤 세균에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겨 병에 걸리지 않는다.
   루크는 그 무거운 기계를 선반에서 내리고 어디에 넣어 가져갈까, 하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좋은 것이 형의 방에서 발견되었다. 형이 언제나 동굴을 탐험할 때 쓰는 탐험 가방이다.
   급히 탐험 가방에 담겨 있는 것을 꺼내 놓고 그 속에 기계를 넣었다. 꼭 맞았다. 루크는 책상 위에 있는 공책에서 한 장을 찢어 내어 급히 형에게 편지를 썼다.
   그런 다음 탐험 가방을 어깨에 지고 밖으로 뛰어나가 남쪽으로 향하는 급행 열차에 올라탔다. 아무도 그를 주의해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 때 최고 회의에서 알리는 소식이 방송되었다.
   "최근 행한 조사로 원인을 알 수 없었던 전력 손실에 대한 수수께끼가 밝혀져 가고 있다. 시민 여러분은 침착하게 보통 때와 똑같이 생활해 주기 바란다. 최고 회의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사실을 발표할 예정이다."
   루크는 종점에서 내리자 이제는 아주 익숙해져서 잘 알고 있는 땅 위로 통하는 길을 부지런히 걸어갔다.
   등에 진 탐험 가방이 무거워서 몸이 앞으로 숙여져 아무리 서둘러도 걸음이 늦어졌다. 벽 사이에 생긴 틈을 빠져 나가기가 무척 힘들었으나 이것으로 땅 위의 죽어가는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자, 루크는 기운이 나서 자꾸자꾸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땅 위 산허리에 나 있는 터널을 나가자 루크는 곧장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벌써 몇 번인지 내려가 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어렵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돌멩이를 걷어차면서 숲으로 들어가는 어귀에 닿았다.
   거기서 그는 잠깐 망설였다. 숲속으로 들어가 본 일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크는 용감하게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서 애거더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들며 헤어졌던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루크는 물론 숲이니 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이 숲을 빠져나가면 애거더가 살고 있다는 로레니아 마을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루크는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저 땅 밑의 깊은 동굴 속 미로에 들어갔을 때에도 훌륭히 빠져나온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좋게 그는 사냥꾼들이 만들어 놓은 오솔길을 찾아낼 수 있었다.
   루크는 가늘고 울퉁불퉁한 그 오솔길을 걸어갔다. 이따금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등에 진 짐이 무거워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는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걸었다.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가죽끈이 어깨에 파고드는 것을 늦추었다.
   햇빛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비추었다. 그러나 헬멧을 쓰고 있었으므로 머리칼 없는 반들반들한 머리를 보호할 수 있었다. 땀이 마스크를 쓰고 있는 얼굴로 흘러내려서 눈으로 들어갔다.
   솔잎 끝이 맨살로 드러내 놓은 팔이며 다리를 따끔따끔 찔렀다. 목이 몹시 말랐지만 목마름을 멈추게 하는 캡슐을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잊어버리고 왔다.
   기운을 내기 위해 루크는 걸으면서 노래를 지어 흥얼거렸다.
  
   나는야 로레니아를 구하러 왔노라.
   무서운 죽음이 찾아온 사람들의 친구가 되려고 왔노라.
   두려워하지 마라, 애거더여.
   그대는 무서운 죽음이 정복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될 것도 알게 되리라.
  
   그는 몇 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쉬지 않고 걸어갔다. 다리는 점점 무거워지고 기운차게 부르기 시작한 노래도 마침내는 끊겼다. 이어지는 중얼거림으로 바뀌어 버렸다.
   등에 지고 있는 검은 상자는 더욱더 무거워져서 오륙 분마다 그는 나무에 기대어 쉬어야만 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햇빛 때문에 지친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오늘은 아주 녹초가 되었는걸.)
   오솔길이 갑자기 꺾여 있었다. 그는 그 곳 풀 위에 쓰러지듯 앉았다. 그 곳은 산그늘이 되어 있어 서늘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몸이 식어서 또다시 햇볕을 쬐고 싶어졌다.
   루크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 땅 위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내가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도 모두 나 같을까?)
   땅밑 도시에서 온 루크는 처음에는 조금도 자기 언저리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 뒤 나무며 바위며 모든 것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고 새의 지저귐이 들리지 않게 된 것을 가까스로 알아차렸다.
   루크는 몇 번이나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조심하는데도 발밑이 잘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상하다. 내가 장님이 되었나? 눈앞에 뭔가 장막 같은 것이 덮인 것 같다."
   그것은 저녁 무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크는 저녁 무렵이라는 것을 시간으로나 알았지, 이렇게 어둑어둑해지는 것은 난생 처음 겪는 일이다. 땅밑 도시에서는 전등불이 일제히 꺼지면 그 때부터 밤인 것이다.
   루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에 첫째 별이 빛나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했다. 둥근 달이 천천히 떠오르더니 숲을 은빛으로 비추기 시작했다.
   루크는 피로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저도 모르게 소리질렀다.
   "야아, 달이다! 지구의 역사를 쓴 책에 나와 있던 진짜 달이다! 정말 이상하구나! 지구는 이렇게 캄캄한데 반짝반짝 빛나다니......."
   하나, 또 하나 별이 반짝이기 시작하여 처음으로 지구의 밤을 본 땅밑 도시의 소년에게 황홀함을 느끼게 했다.
   "애거더는 어째서 별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말은 한 번도 해 주지 않았지."
   애거더를 생각하자, 그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래, 꾸물거리고 있을 수는 없어."
   그는 광선 헬멧의 단추를 눌러 불을 켰다. 그러나 땅 밑에서는 매우 밝은 그 빛이 땅 위에서는 약해져 버려 언저리의 어둠을 충분히 밝혀 주지 못했다.
   신비로움에 휩싸인 밤이 루크가 가는 언저리를 완전한 어둠으로 감싸 버렸다. 좁은 길은 숲 속을 구불구불 구부러져서 저 멀리까지 이어져 있다.
   루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대자연이 밤의 옷을 입은 걸 처음 본다. 그는 이런 낯선 경험이 몹시 무서웠다.
  
   루크는 갑자기 쓸쓸하고 허전해졌다. 자기가 말할 수 없이 작은 것으로 여겨져 견딜 수 없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눈을 크게 부릅뜬 루크는 숲 여기저기에서 들려 오는 이상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앞으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둘레의 숲 속에서 작은 나뭇가지가 딱딱 소리를 내고 풀이 버석거렸다. 동물들이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기도 하고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느닷없이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와 루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소리는 길게 꼬리를 끌며 들리더니 이윽고 웃음 소리와 같은 외침으로 바뀌며 사라졌다. 늑대들이 먹이를 뒤쫓기 시작한 것이다.
   루크는 몹시 지쳤다. 그는 끔찍스러운 꿈의 세계에 있는 듯한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루크는 발을 헛디뎠다. 그쪽은 벼랑이었는데 그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그는 머리를 밑으로 처박고 넘어졌다. 다리를 삐었다. 머리가 나무에 부딪쳐 마스크가 찢어졌다. 비명을 지르면서 그는 벼랑 밑 어둠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더니 다음 순간 정신을 잃었다.
   어둠이 그의 몸을 완전히 휩쌌다. 늑대가 짖는 소리가 또 들렸다.
  

   평화의 사자

  
   최고 회의는 땅밑 도시 슬레얼의 모든 기술자와 여러 직업의 대표자들을 급히 불러 모아 중요한 회의를 열었다.
   모두의 의견은 땅 밑에 자기들의 도시 외에 다른 문명 도시가 있다는 것으로 모아졌다. 베르나르가 가지고 돌아온 낯선 물건 두 가지가 확실한 증거였다.
   여러 세기에 걸쳐 이어져 온 그들의 생각을 이번 기회에 고쳐야만 한다고 누구나가 생각했다.
   "그 다른 사람들은 파이프 관이 잘려 있는 것을 곧 알아차릴 것이오. 우리가 곧 적절한 방법을 마련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들에게 전력을 자꾸 빼앗겨 우리 도시는 멸망하고 말 것이오. 조사된 보고서에 의하면 하루하루가 지남에 따라 전력을 더 많이 잃어가고 있소."
   "지난번 지진은 틀림없이 그들의 짓일 겁니다. 다이나마이트를 폭파시킨 게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전력을 한때 끊어 놓고 파이프 관 속의 본선에서 자기들의 전선을 끌어간 것이오."
   "정전된 시간은 12분이었으니까 그 사이에 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기술도 상당한 모양입니다. 꽤 어려운 작업이니까요."
   '그들'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지금과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땅밑 도시 사람들을 무척 기쁘게 해 주었을 것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 고립된 생활을 해 온 땅밑 도시 사람들의 심한 고독을 최고 회의 사람들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것이 여느때였다면 얼마나 환영받을 일이겠는가? 그러나 지금의 '그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사람들로 여겨지지 않았다.
   결국 최고 회의에서 '그들'은 태연히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정체모를 도둑이라는 의견으로 모아졌다.
   최고 회의의 한 지도자가 말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빨리 실행해야 하오. 어떻게 하면 그들이 끌어간 전선을 떼어 버릴 수 있겠소?"
   "꼭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파이프 관으로 들어가 그들의 전선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작업이오. 과연 누가 할 수 있겠소?"
   기사장은 꽉 움켜쥔 자기의 주먹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온 슬레얼에서 그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오. 다른 사람은 아무도 파이프 관에 들어갈 수도 없으니까요."
   모여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자 베르나르의 아버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베르나르는 자칫 잘못 되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슬레얼 도시를 구하는 일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베르나르는 그들의 전선을 잘라 내는 데 틀림없이 성공할 것입니다. 그는 언제라도 파이프 관에 들어가겠다고 스스로 자신 있게 말하고 있으니까요."
   최고 회의 의장이 베르나르의 아버지와 엇갈려 일어서더니 모두에게 말했다.
   "우리는 어린 소년에게서 훌륭한 본보기를 보고 있소. 그 어린 소년에게 지지 않도록 우리도 용기를 내야겠소. 최고 회의는 베르나르의 제의를 받아들여 그를 곧 떠나게 하겠소......."
   의장은 계속해서 '적에게로......'라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 '적'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어쩐지 머뭇거려졌다. 땅밑 도시 사람들은 언제나 평화를,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땅밑 도시를 만든 그들의 조상들은 인류를 멸망케 하고 살아 남은 몇 안 되는 사람들을 땅 밑에서 살게 만든 대전쟁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것이다.
   의장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베르나르가 그 곳에 갔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채기 전에 일을 해치워야만 하오. 그리고 우리가 늘 생각하는 평화를 위해 그 사람들에게 베르나르를 통해 편지를 보내는 것이 어떻겠소?
   우리는 그들에게 우정을 보여 줌과 함께 우리 도시에 있는 것과 같은 전력 센터를 거기에도 만들 수 있도록 우리와 전문 기술자를 보내 주겠다는 것을 쓰려고 하오. 땅 밑의 자원은 무진장이오. 우리의 전력을 잃지 않고 그들 또한 필요한 만큼 전력을 만들어 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오. 미스터 6B12, 그대의 아들 베르나르에게 그가 평화의 사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전해 주기 바라오. 그럼 여러분, 지금 결정한 일들을 곧 시민들에게 알려 주었으면 좋겠소. 시민들을 위협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모든 것을 시민들도 모두 알아야 하기 때문이오."
   한 시간 뒤, 베르나르는 전력 센터에 모여 있는 기사들 앞에 나타났다. 기사장은 평화를 바라는 문서가 들어 있는 흰 봉투를 베르나르에게 내주고 말했다.
   "베르나르, 주의해 들어 다오. 우리는 파이프 관 속의 본선에서 그들이 끌어간 전선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본디 우리의 절연 전선에서 끌어갔으니까 그 원리는 똑같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절연 전선이 지나간 파이프 관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장소...... 아마도 100미터 이내라고 생각되는데, 거기에 전류를 차단하는 장치가 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그 장치를 멀리서 조종하는 원격 조정으로 조작할 것이라고 예상된다. 그 전류 차단 장치가 어떻게 만들어져 있으며, 또 얼마나 큰지, 어떤 모양인지도 우리는 전혀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슬레얼 시에서 쓰여지는 여러 종류의 전류 차단기의 모형도를 너에게 보여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일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야 한다. 그것은 전선을 끊어 버리기 전에 반드시 전류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면......"
   베르나르는 고압선의 무서운 힘을 상상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덮여 있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 있는 고압선에 3미터 이내로 가까이 가면 눈 깜짝할 사이에 감전되어 죽어 버릴 것이다.
   "기사장님, 잘 알겠어요."
   "그럼 너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이 만들어 놓은 전류 차단기라든가 또는 콘트롤 박스(제어 상자)를 찾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차단 스위치를 찾아서 전선을 끊어 버리기 전에 반드시 전류를 먼저 차단해야 한다. 이번에는 지난번에 네가 썼던 분해기보다 더 강력한 것을 주겠다."
   기사장은 그 새로운 분해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가장 약한 단추를 눌러도 전선쯤은 문제없이 끊을 수 있고, 만일 강력한 단추를 누르면 바위벽도 뚫을 수 있는 기계였다.
   베르나르는 그것을 써서 그들이 쓰고 있는 콘트롤 박스에 가까운 전선을 잘라야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처럼 베르나르는 기사장과 기사인 아버지가 번갈아가며 설명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의 설명이 끝나자, 그는 침착하게 절연복을 입었다. 그런 다음 여느때와 같이 헬멧의 불이 잘 켜지는지, 무전 장치에는 이상이 없는지, 방사능을 찾아내는 장치는 망그러지지 않았는지 등을 하나하나 점검하여 모두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다.
   그것이 끝나자 그는 아버지와 굳은 악수를 나누고, 어머니에게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그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어머니도 와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베르나르를 꼭 끌어안고 웃음을 떠올리며 말했다.
   "베르나르, 네가 성공하기를 빌겠다! 언제나 엄마가 너와 함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베르나르는 어머니가 흥분하지 않고 침착한 것이 기뻤다. 어머니는 아들이 어려운 시험을 치르는 날 학교에 보낼 때처럼 또렷한 목소리로 힘있게 말했다.
   "잘 다녀오너라."
   제5호 파이프 관 입구로 기사장이 다가오더니 대기하고 있는 베르나르에게 말했다.
   "편지는 가지고 있겠지? 그럼 다시 한 번 지시하겠다. 먼저 전류 차단기가 있는 곳까지 간다. 다음에 그 가까운 곳 눈에 띄기 쉬운 장소에 가지고 간 편지를 놓는다. 다음에 차단기 스위치를 내리거나 단추를 누른다. 어떤 것이나 다 전류를 끊는 구실을 한다. 다음에 분해기로 차단기 저쪽 전선......그것도 되도록이면 차단기에서 가까운 부분을 자른다. 알겠지?"
   "예, 잘 알겠어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다녀올께요, 어머니."
   베르나르는 이제는 익숙해진 파이프 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는 아버지의 긴장되어 굳어 버린 얼굴도 보지 않았고, 어머니가 손을 흔드는 것도 보지 않았다.
   평화의 사자 베르나르는 자꾸자꾸 들어갔다. 오늘은 특히 빨리 나아갈 수 있었다. 그것은 지난번처럼 소시지 모양으로 생긴 도구가 담긴 가방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다리는 여느때 있던 곳에 어김없이 걸려 있다.
   분해기는 가벼웠으며 권총처럼 생겼다. 그는 그것을 가슴에 꼭 붙들어매고 중요한 편지는 호주머니에 넣었다.
   첫 모퉁이에 닿았어도 오늘은 쉴 수 없었다. 여러 번 기어다녔으므로 이제는 좁은 파이프 관 속을 쉽게 기어갈 수 있었다.
   직각으로 구부러진 모퉁이를 익숙하게 돌자 이번에는 똑바로 밑으로 내려가야 하는 어려운 곳에 이르렀다. 이 곳도 여러 번 오르내린 사다리를 붙잡고 그는 문제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빠른 속도로 베르나르는 어디의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전류를 훔쳐 가는 곳에 닿을 수 있었다.
   (자아, 다 왔다. 먼저 숨을 좀 조절해야겠다.......)
   그는 파이프 관 속을 기어온 것을 보고했다. 그런 다음 파이프 관 바깥쪽으로 빠져나왔다. 그 곳 터널을 몹시 좁아서 어깨가 여기저기 벽에 닿았으며 머리에 쓴 금속성 헬멧이 언저리의 울퉁불퉁한 바위벽에 부딪쳐 소리를 냈다.
   "그들이 끌어간 전선 옆을 지나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아요. 여기를 자유로이 드나드는 그들은 키가 작은 사람들인가 봐요. 지난번에 장갑과 집게를 발견했던 곳을 이제부터 지나갈 거여요."
   베르나르의 목소리는 저절로 낮아졌다. 그는 너무 여러 가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재빨리 앞으로 나아갔다.
  
   한편 전력 센터에서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기사들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베르나르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레이다로 지켜보고 있다. 이번에는 그 기사들 속에 베르나르의 어머니와 최고 회의의 모든 지도자가 끼어 있다.
   베르나르는 빨리 전류 차단기를 발견할 수 있도록 빌었다. 이런 긴장감을 언제까지나 견딜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히 15미터쯤 나아가자, 터널은 꽤 넓어졌다. 왼쪽으로 구부러진 곳을 지나자 서서 걸을 수 있을 만큼 넓어져 있다.
   "앗, 찾았어요! 차단기가 있어요! 둥근 통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구릿빛이어요. 터널은 서쪽을 향해 있는데 점점 넓어지는 것 같아요....... 그쪽으로는 가지 않겠어요."
   기사장이 당황해서 가지 말라고 하려는 것 같았으므로 베르나르는 급히 그렇게 덧붙여 말했다.
  
   "최고 회의에서 보내는 문서를 놓으러 조금만 더 앞으로 나가 보겠어요. 차단기에서 15미터쯤 떨어진 곳의 길 한가운데에 놓을까 해요. 그렇게 해놓으면 절대로 못 볼 리 없을 테니까요. ......문서를 두고 왔어요. 지금 나는 차단기를 살펴보는 참이어요. 여기저기에 단추가 달려 있는데......모두가 색깔이 달라요. 어떤 것을 눌러야 할지 모르겠어요."
   "모두 다 비슷하단 말이냐?"
   "예......모두 비슷해서 구별할 수가 없어요."
   "그럼, 다른 모양이다. 좀더 잘 살펴보도록 해라."
   "앗, 레버가 달려 있군요. 위에서 아래로 내리게 되어 있는데 이상한 글씨가 씌어 있어요."
   "레버는 하나뿐이냐? 또 없느냐? 잘 봐라."
   "예, 하나뿐이어요. 단추는 모두 10개 있지만 레버는 하나뿐이어요."
   "레버가 장치되어 있는 자리는 어디쯤이냐?"
   "맨 꼭대기여요."
   "베르나르, 분명히 그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된 이상 해보는 수밖에 없겠지. 단숨에 그 레버를 내리고 나서 분해기로 가까이 있는 전선을 모두 잘라 버리도록 해라."
   다행히 베르나르에게는 기사장의 불안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침착한 목소리만 들려 올 뿐이다.
   그 순간 베르나르의 어머니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안 된다, 안 돼! 만지면 안 된다! 그냥 돌아오너라!"
   그러나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다. 베르나르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스피커 앞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베르나르는 살그머니 레버에 손을 대고 용기를 냈다. 자기의 목숨이 이 레버 하나에 달려 있다. 어쩌면 전류가 끊어지지 않고 감전될지도 모른다.......
   갑자기 베르나르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어디선지 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다. 레버에서 들리는 소리는 아니다.
   (앗, 터널 저편에서 들린다!)
   그리고 아득히 먼 터널 저편에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베르나르는 헐떡이는 것처럼 말했다.
   "그들이 오고 있어요!"
   베르나르의 가슴에서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는 마치 북 소리 같았다.
   그에게는 어머니의 비명도 기사장의 명령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올 뿐이다.
   그들은 먼 곳에서 베르나르의 헬멧 불빛을 발견한 모양이다. 그들은 소리소리 지르며 뛰어오기 시작했다.
   베르나르는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 않고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들고 있는 불빛으로 앞장 선 사나이와 그 다음 사나이의 검은 그림자가 뚜렷하게 보였다.
   그들은 모두 키가 작았다. 소년 베르나르보다도 얼마 크지 않았고 뚱뚱하게 살이 찐 거의 알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딱 벌어진 어깨, 긴 팔, 수염투성이 얼굴, 이마에는 램프를 달았는데 그것이 마치 그들을 눈이 하나밖에 없는 괴물처럼 보이게 했다.
   그들은 베르나르를 향해 뛰어온다. 모두 울부짖는 듯한 기분나쁜 소리를 지르며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가!
   베르나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기분나쁜 사람들이구나."
   맨 앞장 선 사나이는 길 한복판에 놓여 있는 평화의 편지를 짓밟고 이리로 뛰어온다. 이것으로 평화적으로 의논하자는 희망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베르나르는 급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시작했다. 얼른 차단기의 레버를 내리고 권총처럼 생긴 분해기를 꺼내어 차단기 바로 옆의 전선을 향해 단추를 눌렀다.
   분해기는 탁탁 불튀는 소리를 냈고 전선에서는 빨간 불길이 솟았다. 분명히 전선은 끊어진 것이다!
  
   맨 앞에 선 사나이는 뜻밖의 일에 놀라 갑자기 멈춰 섰다. 그 수염이 더부룩한 키 작은 사나이는 팔을 쳐들더니 은빛 원통처럼 생긴 것을 휘둘렀다. 그러자 파란 광선이 확 튀어 나왔다.
   베르나르는 등에 날카로운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 몹시 숨이 찼다. 어깨 너머로 뒤돌아보니, 앞장 선 사나이와 다음에 선 두 사나이가 불안한 듯이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전력 센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스피커를 통해 들려 오는 소리로 무시무시한 일이 생겼음을 알았다. 그러나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처지이므로 그들은 안타까와할 뿐이다.......
  
   기사장이 소리 질렀다.
   "베르나르, 쏴라! 분해기로 그들을 쏴 버려라! 가장 큰 단추를 눌러 쏘란 말이다!"
   베르나르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고통스러워 얼굴을 찡그리면서 상대편에게 분해기를 겨냥했다. 그것은 무기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으나 무기 역할도 충분히 해냈다. 그는 단추에 손가락을 댔다.
   그들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다. 힘껏 단추를 누르려던 바로 그 때 최고 회의가 그에게 일러 주던 사명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평화의 사자가 아니었던가! 비록 저들이 적이라 할지라도 내가 맨 처음 한 일이 사람을 쏴 죽이는 일이어야 하는가.)
   베르나르는 괴롭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상대가 어떤 이라도 죽일 수는 없다......."
   그리고 슬레얼 사람들의 믿음을 배반하는 거라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로부터 몇 미터 앞 터널 천장을 향해 단추를 눌렀다.
   쾅!
   벼락치듯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터널 천장이 허물어졌다. 그는 바위며 돌 부스러기에 깔렸으나 동시에 적이 슬레얼 시에 가까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전력 센터에 있는 사람들은 폭발 소리가 여러 차례 일어난 것을 들었다. 베르나르의 어머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면서 말했다.
   "오오, 베르나르......가엾은 베르나르......."
  

   폴의 시련

  
   폴은 최고 회의의 한 지도자와 텔레비젼 전화로 이야기를 나눈 뒤 동생 루크를 찾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몇 번이나 무전으로 불러 냈지만 도중에 끊어져 버렸다. 사실은 루크는 그 날 애거더의 병에 대한 생각만이 머릿속에 꽉 차서 형과의 연락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폴은 무섭게 화를 내고 있었다. 꼭 있어야 할 동생이 보이지 않으므로 운동이라도 해서 화나는 마음을 풀어 보려고 생각했다.
   나선형 산책장으로 가서 음악에는 맞추려고도 하지 않고 두 번이나 연거푸 무척 빠른 속도로 돌았다. 그런 다음 수영장으로 달려가 마음껏 헤엄쳤다. 아무렇게나 함부로 팔을 허위적거려 물방울을 사방에 튕겼다.
   수영장에서 나왔을 때 텔레비젼 공개 프로그램 편성자와 약속했던 일이 생각났다. 아직 어린 나이로 공개 텔레비젼 프로그램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더없이 명예로운 일이다. 그러나 최고 회의의 한 지도자에게 그런 말을 들은 지금은 그것도 덧없는 꿈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최고 회의의 한 지도자는 그에게 제1급 시민이 될 자격을 빼앗아 버리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어렸을 때부터 먼 장래의 계획을 세워 그토록 노력을 해 온 것도 결국은 제1급 시민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으므로 동생 루크가 집에 돌아와 있으리라 생각하고 폴은 집으로 뛰어갔다. 청정 검사를 하는 로봇이 빨간 신호를 내고 있는데도 그는 거실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이봐 루크 15P9! 어디 있어. 루크 15P9! 할 얘기가 있어!"
   크게 소리쳐 불렀지만 그 목소리는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에 헛되이 메아리칠 뿐이다. 그는 온 방을 닥치는 대로 들여다보았다.
   아버지의 실험실을 들여다보았을 때 선반 한 구석이 비어 있는 것을 깨닫고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언제나 의료 기구로 빽빽이 차 있던 선반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이상하다? 아버지가 광선기를 가져오라고 조수를 보내기라도 했나?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폴은 자기 방에 들어가 보고 더욱 놀랐다. 탐험 가방이 없어지고, 그 속에 담아 두었던 물건들이 온통 흩어져 있지 않은가?
   이것도 틀림없이 동생의 짓임에 틀림없다. 만일 폴이 조금이라도 차분하게 생각할 여유만 있었다면 언제나 정돈하기를 좋아하는 동생이 이렇게 했을 때에는 중대한 일이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더 참을 수 없어. 참는 것도 한도가 있지! 저 멍텅구리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한 거지?"
   그 때 동생이 써 놓고 간 공책 조각이 보였다. 간단한 말을 흘려 쓴 것이었으므로 폴의 화난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폴은 자신의 분노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성질을 가졌다.
   종이쪽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형, 저녁 식사 시간에 늦어질 것 같으니 저녁 식사는 먼저 해.'
   폴은 화를 내면서도 생각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앞으로 두 시간이면 밤인데 말야. 아버지만 계셨다면 루크도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가 집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폴은 더욱 큰 책임을 느꼈다.
   그는 거실로 돌아오자 저녁 식사인 알약을 두 사람 몫 주문했다. 그런 다음 테이블 앞에 앉았을 때 손목에 차고 있는 무전 장치가 희미한 신호를 보내왔다.
   (이젠 너무 늦었어!)
   폴은 마음껏 숨을 들이마시고는 자기가 얼마나 화를 내고 있는지 또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가를 단숨에 퍼부어 주려고 별렀다. 그러나 무전 장치에서 들려 온 것은 너무도 약하디약한 소리였으므로 폴의 기세는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 잘 알아들을 수도 없을 정도로 약하디약한 소리였다.
   "형, 도와줘! 얼른 와서 나를 찾아내 줘......캄캄해!......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나는 마스크를 잃어버렸어...... 다리가 부러졌어......형!......나......무서워! 얼른 와 줘."
   그것은 동생의 필사적인 목소리였다. 그러나 무전은 거기서 뚝 끊어져 버리고 폴이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체 루크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동생을 끔직이 위하는 폴은 이제라도 달려가 구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캄캄하다'고.
   캄캄한 곳이란 대체 어디란 말인가? 동굴 속일까? 그러나 동굴이라면 경비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서 찾아내 줄 것이 아닌가.
   폴은 그래도 만일을 위해 급히 경비하는 사람을 텔레비젼 전화로 불러냈다.
   그러나 폴이 생각한 그대로였다.
   "동굴에는 이미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은 지질을 조사하는 탐험자도 그 밖의 탐험자도 한 사람 없었습니다."
   지질을 탐험한다는 말을 듣고 폴은 문득 루크에게서 받은 그 석류석 생각이 떠올랐다. 사실은 그 돌멩이 때문에 여러 가지 귀찮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폴은 그것을 실마리로 좀 침착하게 차근차근 생각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문가들은 그 석류석이 빙하 때문에 동그랗게 된 것으로 판정하여 이렇게 의견을 말했다.
   "땅 위의 돌멩이와 아주 비슷하다."
   폴은 급히 자신의 책상 서랍을 뒤져 그 언저리를 온통 흩어 놓은 뒤 가까스로 종이쪽지 한 장을 찾아냈다. 그것은 동굴을 탐험하고 돌아오다가 에릭이 급행 열차 안에서 준 시가 적혀 있는 종이였다.
   그는 에릭의 시를 되풀이해서 읽어 보았다.
  
   난생 처음 우리는 이 쓸쓸한 세계를 빠져나가 보았다.
   나는 수많은 신기함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루크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루크도 마찬가지였다......'
   이 말은 루크가 지금 땅 위에 있다는 말이 아닌가?
   (루크를 찾으려면 땅 위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루크는 어떻게 해서 땅 위에 갈 수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루크를 구하러 땅 위로 나갈 수 있을까?
   폴은 여느때 자기가 동생에게 좀더 신경을 써 주지 못한 일을 후회했다. 그리고 또 동생이 하는 일에 대해 자기가 너무 무관심했다는 걸 알았다.
   (좀더 마음을 써서 돌봐 주어야 했었는데......정말 잘못했어.)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는 곧 텔레비젼 전화로 에릭을 불러 냈다. 에릭의 동그란 얼굴이 곧 스크린에 나타났다.
   "에릭! 루크가 지금 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어. ......아주 위험하게 되었대! 루크가 어디에 있는지 너는 알고 있겠지?"
   폴은 에릭의 파란 눈에 난처한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루크가 위험하다고? 하지만 아무에게도 절대로 그 비밀을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나는 루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알아. 하지만 에릭! 부탁이야! 나는 방금 네가 쓴 시를 여러 번 되풀이해 읽어 보았어. 그리고 너만이 루크를 구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대체 루크는 어디에 있지? 땅 위에 있겠지? 동생은 마스크를 잃어버렸대! 하지만 나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
   에릭은 그 자리에서 마음을 정했다. 그토록 단단히 맹세를 했다 해도 그 친구가 지금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험에 빠져 있는 것이다. 맹세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호된 꼴을 당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폴, 나는 지금 혼자 있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베르나르와 함께 전력 센터에 가 계셔서 아무도 없기 때문에 함께 갈 수는 없지만 가르쳐 줄 수는 있어요.
   남쪽으로 가는 급행 열차 종점에서 만나요. 5분 뒤에 가 있겠어요. 거기서 루크가 땅 위로 간 길을 가르쳐 줄께요. 안녕."
   폴은 아버지와 연락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험실에는 엄한 규칙이 있다.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일단 실험이 시작되기만 하면 절대로 중단할 수 없다.
   폴은 동생을 구하러 혼자서 가야 한다.
  
   집을 나서기 전에 그는 루크의 괴로와하던 목소리가 다시 생각났다. 동생은 마스크를 잃어버리고 다리가 부러졌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폴은 모든 걸 잘 생각해 보고 땅 위로 가는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저녁 식사 알약을 동생의 몫까지 함께 호주머니에 넣었다. 마스크는 급행 열차 종점에 갖추어져 있는 예비 마스크를 슬쩍 집어가기로 했다. 말없이 가져간다는 것은 땅밑 도시에서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폴은 아버지 침실로 가서 약상자를 열고 붕대, 소독약, 진통제 등을 꺼내어 자기의 구급 가방에 넣었다. 다음에 침대 홑이불을 벗겼다. 그것으로 동생을 싸 주려고 생각한 것이다. 맨 마지막에 동굴을 탐험할 때 입는 옷을 입었다.
   피켈이 바닥에 쓰러지며 크게 소리를 냈다.
   "그래! 이것도 가져가자."
   그는 피켈을 집어들었다.
   피켈은 끝에 뾰족한 쇠가 붙어 있다.
   "좋아. 이거라면 됐어. 무기도 되니까."
   폴은 옛날의 전사처럼 싸울 준비를 끝내자, 에릭이 기다리고 있는 급행 열차 종점으로 급히 갔다.
   에릭은 남쪽으로 가는 급행 열차 종점 끝에 있는 틈새기로 폴을 데리고 들어갔다. 안으로 조금 깊숙이 들어가자 넓은 곳이 나왔다.
   캄캄했기 때문에 둘 다 헬멧의 불을 켰다. 둘은 몸을 웅크리고 마주 보았다. 지난번 에릭과 루크가 거기서 마주 보았을 때처럼.
   에릭이 폴에게 말했다.
   "이 길을 곧장 가면 틀림없이 땅 위로 나간 수 있어요. 하지만 나는 루크가 땅 위에 나간 뒤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터널 출구까지였으니까요. 게다가 나는 그 뒤로는 루크에게 아무 말도 듣지 못했어요......."
   "에릭, 고마와. 전등불이 꺼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 아직 시간은 넉넉하니까. 내일이 되어도 내가 돌아오지 않거든 실험실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에게 좀 알려 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네 비밀은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아무도 네가 땅 위에 갔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네가 땅 위에 갔던 일은 금지되어 있는 일이야."
   에릭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만일 폴 형이 땅 위에서 잡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큰일나겠지요?"
   폴은 씁쓰름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괜찮아. 내 죄는 그것 말고도 있으니까. 그럼, 나는 떠나겠어. 이건 네가 쓴 시야. ......버리도록 해. 불태워 버리는 게 좋을 거야."
   폴은 헬멧을 쓴 머리를 두세 번 끄덕여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런 다음 접은 홑이불을 어깨에 메고 피켈을 집어들자, 어둠 속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갔다.
   조금 뒤, 터널을 지나 땅 위 출구에 닿은 폴의 얼굴에 차디찬 밤공기가 와 닿았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올려다보니 어지러웠다. 그러나 폴은 곧 동생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에 루크가 지나간 흔적이 있을 거야. 나뭇가지가 꺾여 있다거나 풀이 짓밟혀 있다거나 흙 위에 발자국이 남았다거나.......)
   폴은 어떤 것이 나타날지 알 수 없으므로 언저리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눈앞에는 끝없는 어둠이 펼쳐져 있다. 그 어딘가에 동생이 지금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이다.
   폴은 난처한 얼굴로 바위 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 문득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루크는 지금 다시 정신을 차렸을지도 모른다.)
   무전 장치를 조절하고 그는 몇 번 불러 보았다. 그러자 어디선가 응답이 왔다. 루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 들린다.......)
   루크의 목소리는 가까운 곳에서 들려 왔지만 여전히 약하디 약했다
   "형......도와줘......."
   "루크, 내가 왔어 힘을 내라. 이제는 무서워할 것 없어. 나는 지금 땅 위의 터널 출구 옆에 있어. 어느 쪽으로 가면 되는 거지?"
   "나는 숲 속에 있어. 여러 시간 걸었어."
   "어느 쪽이지? 빨리 가르쳐 줘."
   "거기서 죽 산을 내려오면 돼."
   그런 다음 잠깐 말이 끊어졌다. 폴은 몇 번이나 불렀다. 그러자 다시 들려 왔다.
   "나는 지금 벼랑 밑에 있어. ......숲으로 곧장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돌면 오솔길이 있어. 그 길을 남쪽을 향해 자꾸자꾸 걸어오면 돼."
   작은 나뭇가지를 소리내어 부러뜨리면서 폴은 처음 온 땅 위를 용감하게 걸었다. 그 소리가 벼랑 밑 우묵한 곳에 쓰러져 있는 루크의 무전 장치에도 들렸다.
   루크는 지금 자기가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저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형이 어려운 일에 부딪치게 되면 반드시 중얼거리는 기도의 말이 들려 왔기 때문이다.
   "천 대의 발전기에 맹세한다! 아니지, 슬레얼 시의 모든 동굴에 맹세한다! 이건 또 뭐야! 엉? 에이 귀찮게 구는 나뭇가지다!"
   갑자기 조용해졌다. 폴은 숲 속에 나 있는 오솔길로 나온 것이다. 나뭇가지를 헤치며 걸어온 이제까지의 길에 비하면 그 오솔길은 마치 땅밑 도시의 움직이는 보도와 같이 평평하게 여겨졌다.
   폴은 부지런히 오솔길을 서둘러 걸었다. 걸어가면서 그는 쉴새없이 이야기를 하며 루크를 격려해 주었다.
   루크의 왼편에서 갑자기 웃음 소리와 같은 소리가 일어나고, 그 소리에 대답이나 하는 것처럼 오른편에서도 똑같은 소리가 들렸다.
   루크가 떨면서 물었다.
   "형, 지금 그 소리 들었지?"
   "그래, 아마 부엉이가 운 모양이다."
   폴은 루크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했지만 그것이 늑대 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루크는 형의 말을 믿고 안심한 모양이다.
   "어휴, 살았다! 나는 늑대인 줄로만 생각했어......."
   루크의 겁먹은 마음을 딴 곳으로 돌리려고 폴은 루크에게 어떻게 땅 위에 오려고 생각했는가를 물었다. 그리고 동생이 애거더가 사는 마을에 퍼진 무서운 전염병을 없애 주려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폴은 몹시 놀랐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애거더의 마을은 훨씬 멀어. 그래서 그만 밤이 되고 만 거야. 그래도 광선 헬멧을 잃어버리지 않아 다행이야. 만일 그걸 잃어버렸다면 세상이 온통 캄캄하기 때문에 무서워서 죽어 버렸을지도 몰라."
   "마스크를 잃어버려서 어떻게 했니?"
   "처음에는 숨이 막혀 버리는 줄로만 알았어. 하지만 자유롭게 숨쉴 수 있고...... 그뿐만 아니라 땅 위의 공기는 아주 신선해. 저어, 땅 위의 공기에는 벌써 오래 전에 독이 없어진 모양이야."
   폴이 구하러 와 주었으므로 마음씨 푹 놓여 루크는 다리의 아픔도 잊고 있었다.
   "운좋게도 아프시론 광선기는 망그러지지 않았어. 로레니아 마을에 가서 얼마든지 쓸 수 있어."
   "응, 그래. 빨리 거기에 가고 싶다."
   폴은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오솔길이 어디까지나 계속되므로 참을 수 없이 안타까왔다.
   "루크, 대체 네가 있는 곳은 어디니?"
   그러자 루크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 왔다.
   "형, 내 바로 머리 위 나뭇가지에 커다란 짐승이 있어. 헬멧 불빛으로 그 짐승의 눈이 번쩍거리고 있어. 큰 표범인 것 같아."
   폴은 급히 뛰기 시작했다. 뛰면서 동생에게 일렀다.
   "루크, 내 말 잘 들어야 해. 불빛을 그 짐승의 눈에 똑바로 비추고 있어......그 짐승의 눈에서 눈을 떼어선 안 된다. 뭔가......뭔가......무기는 없니?"
   "돌멩이를 쥐고 있을 뿐이야. 형, 얼른 와 줘!"
   폴은 정신없이 뛰었다.
   "형, 아주 가까이 왔어! 바로 가까운 벼랑 밑에 있어. ......벼랑에서 굴러떨어지지 마!"
   폴은 나뭇잎 사이로 동생의 불빛을 발견했다. 폴은 정신없이 그쪽으로 뛰어갔다. 소나무 가지에 걸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루크, 움직이면 안 돼!"
   폴은 숨을 헉헉 몰아쉬면서 벼랑 끝에 닿았다. 동생 쪽을 흘끗 바라본 순간 폴은 너무나 무서워 등골이 오싹했다.
   루크는 흰 옷을 입고 겨우 3미터쯤 앞 우묵하게 들어간 곳에서 탐험 가방에 기대앉아 머리 위 나뭇가지를 뚫어지게 올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 나뭇가지에는 큼직한 퓨마가 올라앉아 있다. 퓨마는 루크가 꼼짝도 하지 않으므로 안심했는지 헬멧 불빛도 무서워하지 않고 루크에게 뛰어내리려고 몸을 도사렸다.
   퓨마는 긴 꼬리로 공기를 날카롭게 철썩 때리고 목을 움츠렸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휙 뛰어내렸다. 그와 함께 폴도 퓨마를 향해 뛰어내렸다.
   퓨마와 폴은 허공에서 세게 부딪쳤다. 생각지도 않게 옆구리를 얻어맞아 소스라치게 놀란 퓨마는 허공에서 반 바퀴를 돌자 루크에게서 60센티미터쯤 떨어진 곳에 뛰어내렸다.
   세게 부딪치는 바람에 폴은 대굴대굴 굴렀다. 헬멧은 어디론지 날아가 버렸지만 피켈은 단단히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폴은 마스크를 벗어 버렸다. 그편이 더 똑똑히 보인다. 폴은 퓨마가 이번에는 자기를 향해 덤벼들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학교에서 로봇을 상대로 심한 연습과 훈련을 쌓았던 것이 지금의 폴에게는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폴은 벌떡 일어나 두 손으로 피켈을 꽉 움켜잡았다.
   퓨마가 덤벼들려고 몸을 도사렸을 때는 폴도 충분히 막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몸집 큰 짐승의 그림자가 밤하늘을 가릴 것만 같았다. 폴은 짐승의 비릿한 숨결을 맡았다. 퓨마는 온몸이 얼어붙을 듯한 울음 소리를 질렀다.
   폴은 온몸의 힘을 피켈에 담아 퓨마의 콧등을 힘껏 때렸다. 너무 세게 때렸으므로 피켈이 부러졌다.
   퓨마는 저쪽으로 나동그라졌고, 폴은 이쪽에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이제 폴에게는 무기가 없다. 폴은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없을까 언저리를 더듬거려 보았다. 돌멩이를 주웠다. 폴은 그 돌로 끝까지 싸우려고 마음먹었다.
   가쁜 숨을 헐떡거리며 폴은 어둠 속에서 퓨마의 움직임을 살펴 보았다.
  
   퓨마는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는다. 으르렁거리던 소리도 멈춰 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폴은 일어섰다. 가까스로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 둘레가 잘 보이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퓨마는 죽어 있었다.
   폴은 루크에게로 뛰어갔다. 무서움과 고통으로 루크는 기절해 있었다. 폴은 루크의 헬멧을 벗겨 자신이 쓰고 조심스럽게 퓨마에게 다가갔다.
   정말 행운이다. 피켈 끝이 퓨마의 심장을 깊이 꿰뚫고 있었다.
   폴은 자기의 헬멧을 찾았으므로 동생에게 헬멧을 다시 씌워 주고 벼랑 위로 되돌아갔다. 그는 거기에 두었던 구급 가방과 홑이불을 들고 급히 되돌아왔다.
   폴은 곧 동생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주사기를 꺼내어 진정제 주사를 놓았다. 그리고 부러진 다리를 펴서 곧은 나뭇가지를 잘라 부목을 대주었다.
   폴은 무거운 아프시론 광선기를 바위 뒤에 옮겨 놓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중에 필요하게 될 테니까 그 때 가지러 와야지."
   조금 뒤 그는 동생을 홑이불로 싸서 어깨에 멨다.
   마스크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곧 그만두기로 했다. 땅 위의 공기에 전혀 독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폴은 어깨에 짊어진 동생의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애거더가 있는 로레니아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대체 로레니아 사람들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줄까?)
   폴은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땅 밑에서 온 두 소년을 미신에 젖어 있는 그들이 과연 환영해 줄 것인가?
   이윽고 새벽이 가까와지며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폴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새빨간 해님이 하늘을 온통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빛깔로 물들이면서 올라오고 있다. 생전 처음으로 보는 해님이다.
   조금 뒤 폴은 잘 일구어 놓은 밭 옆을 지나갔다. 그는 이제 지칠 대로 지쳐 마치 지구라도 짊어진 것처럼 여겨졌다.
   마침내 높은 울짱이 보였다.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것인데 그 안에 마을이 있는 것 같았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개가 짖어 대고 작은 새는 푸른 나무에서 노래부른다.
   잠깐 쉬면서 좀더 마을의 모습을 잘 봐야겠다고 생각한 폴은 다친 동생을 길바닥에 가만가만 내려놓았다.
   루크는 눈을 뜨고 핼쑥한 얼굴에 웃음을 떠올렸다. 폴은 목마름을 멈추게 하는 캡슐을 루크의 입 속에 밀어넣어 주었다. 그런 다음 자기도 먹었다.
   루크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루크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였다.
   (헛소리를 하고 있구나.)
   폴은 이렇게 생각하고 동생의 이마를 가만가만 닦아 주었다. 루크의 이마는 피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루크가 갑자기 말했다.
   "형....... 나는 지금 막 애거더와 이야기했어. 우리가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다고 가르쳐 주었지만 알아들은 것 같지 않았어. 애거더의 머릿속은 끔찍하고 무서운 것으로 꽉 차 있었어. 틀림없이 그 병에 걸렸나 봐."
   폴은 루크가 텔레파시의 능력으로 애더거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동생이 정신이 약간 이상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폴은 다시 일어나 두 팔로 동생을 안아올리려 했다. 바로 그 때 길 건너편 모퉁이에서 무시무시한 동물이 나타났다.
   지금은 무기인 피켈도 들고 있지 않다. 폴은 무언가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 언저리를 둘러보다가 막대기를 집어들었다. 폴은 동생을 등 뒤로 돌려 가로막고 새로 나타난 적이 덤벼들기를 기다렸다.
  

   로레니아 마을

  
   큰 동물 세 마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폴을 향해 달려온다. 그 동물들은 뿔을 휘두르며 폴을 위협하는 것처럼 꽥꽥 소리를 지른다. 땅바닥이 거센 동물들의 발굽에 짓밟혀 떨리는 듯했다.
   폴은 마침내 마지막이 왔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맨 앞에서 달려온 한 마리가 얼룩얼룩한 몸을 흔들며 덤벼들었다.
   폴은 들고 있던 막대기를 휘둘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동물은 옆으로 비켜 서더니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저 녀석은 놀란 모양이야!"
   뜻밖에도 손쉽게 쫓아 버릴 수 있었으므로 폴은 의기양양해서 한층 더 용감해졌다.
   "이 겁장이들아! 어서 덤벼라!"
   폴은 다른 두 마리 동물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두 마리는 그대로 모른 체하고 가버렸다.
   (그냥 노려보기만 해도 충분해. 저것들은 사나운 황소였을 거야. 옛날 땅 위가 멸망하기 전에 에스파니아 사람들이 투우장에서 싸웠다는 바로 그.......)
   폴은 그렇게 생각하고 지금의 용감한 자기 모습을 보아줄 구경꾼이 없는 것이 분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동물들은 폴의 생각과는 달리 여느 소였다.
   바로 그 때 또 다른 소 떼가 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폴은 이제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소 떼 속에 한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이 뭐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작은 나뭇가지로 소 떼를 몰고 가는 것을 보자 폴은 눈이 동그래졌다. 소 떼는 소년에게 끌려 얌전하게 지나갔다.
   그 소년은 여기저기 찢어진 옷을 입은 낯선 폴을 보고도 별로 이상하지 않은 듯 정답게 손을 흔들어 주고 그대로 가버렸다.
   폴은 어쩔 바를 몰라하다가 다시 루크를 등에 업고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맞아 줄 것인가를 생각하며 울짱을 둘러친 마을로 걸어갔다.
   폴이 마을 어귀에 닿자 큼직한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그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허연 수염을 기르고 숱 많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엄하게 생긴 노인이었다. 그 노인은 많은 사람들 속에서 눈에 띄게 돋보였다.
   남자도 여자도 비슷비슷하게 생긴 기다란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다.
   그들은 모두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어 땅밑 도시에서 온 소년에게는 거추장스럽고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폴은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동생을 안은 채 침착한 걸음걸이로 사람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사람들은 곧 폴을 빙 둘러쌌다. 몸이 큰 한 남자가 두 손으로 루크를 대신 받아 안아 주었다.
   한 여자가 루크의 머리를 조용히 들어올리더니 흰 빛깔이 나는 마실 것을 먹여 주었다. 루크는 싫어하는 기색도 없이 마셨다.
   폴은 안심하고 노인에게로 돌아섰다. 그러자 노인은 다정하게 폴의 두 손을 잡았다. 그 뺨에 눈물이 주르륵 흘렸다.
   "잘 와 주었소. 정말로 잘 와 주었소."
   노인이 그렇게 말했다. 폴은 그 말을 조금은 알아들었다. 그 말이 땅밑 도시의 학교에서 고대학을 공부할 때 배웠던 아득한 옛날의 말과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다.
   폴은 조금 더듬거리면서 그들에게 따뜻하게 맞아줘 고맙다고 말했다. 그 사람들은 낯선 폴과 루크를 마치 자기들의 친구나 동료처럼 받아들여 준 것이다.
   그들은 폴의 둘레에 모여 찢어진 옷을 만져 보기도 하고 흙투성이가 된 플라스틱 제 구두를 살펴보기도 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폴을 문 안으로 안내했다.
   폴은 살아 있는 동안 로레니아에서 받은 첫인상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햇빛을 받고 있는 통나무집, 작은 교회 건물, 넓은 뜰 한가운데 있는 우물, 그리고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둘러친 높은 나무 울짱.
   이상한 냄새가 나서 폴은 놀랐다. 그러나 그것은 숯불로 음식을 만드는 냄새와 질병을 쫓기 위해 태우는 약초 냄새였다.
   그 때 짚요 위에 눕혀져 있던 루크가 폴을 불러 말했다.
   "형, 애거더를 만났으면 해......."
   사람들은 모두 루크 쪽을 보았다. 그 가운데 텔레파시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어 루크의 말을 모두에게 전했다.
   루크를 안아다 준 금발의 키 큰 사람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애거더는 내 딸인데 그 아이는 지금 병이 매우 심하오. 그 아이가 당신들이 올 거라고 말했을 때 나는 딸아이의 머리가 돌아 버린 것으로 생각했었소."
   "내가 애거더를 만날 수 있을까요?"
   "앉은 사람 옆에 가까이 가면 어떤 사람이라도 병이 옮게 되오."
   "하지만 나는 면역이 되어 있어요. 형, 내가 애거더를 만나도 위험하지 안다는 말을 전해 줘."
   금발의 큰 남자는 슬픈 듯이 말했다.
   "애거더는 이미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오. 그 아이는 당신이 우리를 구해 주러 올 거라고 했소."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복받치는 설움에 자꾸만 끊기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내 아내도......내 아들도......그리고 이번에는 애거더마저도......."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폴이 그 마을의 족장이라는 흰 수염을 기른 노인에게 말했다.
   "우리는 아프시론 광선 기계를 가지고 왔어요. 그 광선은 곧 모든 병을 말끔히 고쳐 줄 거여요."
   그렇게 설명한 다음 폴은 루크가 다친데다가 기계가 너무 무거워 숲 속에 두고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곧 젊은이 몇 사람이 기계를 가져오기 위해서 숲 쪽으로 달려갔다.
   그로부터 네 시간쯤 지나서 마을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작은 교회에 모여 하나님이 보여 준 기적에 대해 감사드리고 있었다.
   한 번 걸리기만 하면 꼼짝없이 죽어 버리는 끔찍한 병이 지금은 씻은 듯이 정복되어 버린 것이다.
   애거더의 아버지는 자그만 소리를 내며 아프시론 광선 기계 앞으로 맨 먼저 딸 애거더를 안고 나왔다. 애거더의 몸은 열이 너무 높아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러나 흰 빛을 내는 아프시론 광선을 쬐자 애거더는 눈 깜짝할 사이에 말짱해졌다. 높은 열은 불과 몇 초 사이에 사라졌다. 맥도 여느때의 상태로 돌아왔다
   애거더는 눈을 뜨더니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애거더의 오빠는 더 놀라왔다. 그는 깊은 혼수 상태에 빠져 정신이 전혀 없었으며 온몸에 물집이 나 있었다.
   그런데도 광선을 한 번 쬐자 곧 의식을 되찾고 부르텄던 물집도 씻은 듯이 나아서 이제는 상처 자국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폴이 설명했다.
   "상처 자국은 회복 광선을 쬐면 없어집니다."
   마을 사람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비롯해서 병이 심한 사람, 가벼운 사람, 심지어는 아직 걸리지 않은 사람까지도 모두 아프시론 기계 앞에 늘어섰다. 매우 심했던 사람도 모두 다 나았다. 죽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로레니아 마을의 교회 종이 기쁜 감사의 마음을 담뿍 담고 언저리에 울려 퍼졌다.
   모두 교회에 모이자, 촛불이 밝게 켜져 있는 제단 앞에 폴을 앉게 했다. 그 자리는 마을의 가장 웃사람이 앉는 자리였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부르는 감사 노래에 귀를 기울이면서, 폴은 오랜 세월 애써서 끈질기게 연구를 계속한 결과 발견된 이 귀중한 광선과 광선 기계를 발명한 아버지를 생각했다.
  
   땅 위의 자연과 같은 것이 땅밑 도시에는 전혀 없기 때문에 그 곳의 사람들은 모든 시간을 과학이나 학문에 쏟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문명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폴은 그런 기막히게 훌륭한 것들도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사람들은 몇 세기 동안이나 땅 밑에서 생활하며 이토록 아름다운 땅 위의 세계를 알지 못하고 갇혀 지내오지 않았는가.
   로레니아 사람들의 조촐한 식사에 초대되었을 때, 폴은 자기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이제까지 이런 음식을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폴은 로레니아 사람들의 여러 가지 음식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가 아주 조금밖에 먹지 못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놀렸다.
   폴은 그런데도 너무 많이 먹은 것이 걱정되었다. 그의 소화 기관은 알약과 같은 식량을 먹도록 버릇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폴은 조심스럽게 집에서 가지고 온 알약을 먹었다. 그리고 땅 위 사람들과 똑같이 먹을 수 있게 될 날은 훨씬 뒷날의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곧 좋아진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단풍나무 꿀로 만든 맛있는 시럽이었다. 그는 그것을 조금 얻어가기로 했다.
   폴은 족장과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족장은 마을 사람들에 대해 애거더가 루크에게 가르쳐 준 것보다 훨씬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족장이 물었다.
   "어떤 이유로 땅 밑의 도시를 슬레얼이라고 이름 지었지요?"
   "땅밑 도시를 맨 처음 만든 우리 선조들이 지은 이름은 '슬몬 로열'이었다고 해요. 그건 바꾸어 말하면 '로열 산 밑의 도시'라는 뜻이었어요. 그러던 것이 점점 바뀌어서 슬레얼이 된 것이지요. 정식 이름으로는 슬레얼 3천이라고 불러요."
   "그 3천이란 뭐지요?"
   "그것은 땅 위에서 살았던 무렵의 선조들이 쓰던 기원 연수를 그대로 이어받은 거래요. 지금은 기원 31세기니까 3천 년이 되는 것이지요."
   "이 세상이 그렇게 오래 되었다니...... 당신네들은 역사를 알고 있으니 부럽소. 살아 남았던 우리 조상들은 대부분 어린아이들이었으므로 과거의 문화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소.
   우리는 또다시 미개인과 똑같은 생활을 시작해야 했던 것이오. 과학적인 지식이라는 것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소. 역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라면, 전쟁을 미워하는 일과 다시는 전쟁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결심뿐이었소. 이 마을이 왜 로레니아라는 이름이 붙여졌는가 하는 것도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센트로렌스 강에서 따온 것이 아닐까요?"
   "그런 강이 있었던가요? 그렇다면 그럴 것이 틀림없겠군요. 그리고 저 산은 로열 산일 거요, 틀림없이. 그건 그렇고, 당신은 이 나라를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일이 없다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을 많이 아는군요. 우리의 말도 아니 말이오."
   "예, 그건 아주 오랜 옛날의 학문을 공부할 때 배웠어요."
   "당신네들의 종교는? 우리와 같소?"
   "우리는 종교를 간단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우리가 선조에게서 이어받은 종교는 땅밑 도시의 생명의 근원이 되는 거대한 발전기여요. 땅밑 도시의 사람들은 여러 세기에 걸치는 동안 훌륭한 힘을 가지고 있는 그 기계를 믿고 따르게 된 탓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을 믿지 않소?"
   "하나님이 있었다는 것을 잊고 만 것이지요. 아무튼 모든 것이 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인공적인 것이니까,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생각해 낸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또다시 자연이라는 것을 접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하나님도 생각하게 될 거여요."
   "그 일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소. 종교는 이 곳 로레니아에 사는 우리들 생활의 중심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텔레파시의 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방사능에 의해서 일어난 괴이한 변화라고 생각하오. 또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은 유전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이상한 능력으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소. 우리들 가운데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와 같은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자랑하지 않소. 오히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려고 애쓰고 있을 정도라오."
   "그렇지만 매우 편리한 힘이라고 생각해요! 애거더의 덕분으로 우리는 이렇게 친절한 대접을 받게 되었으니까요."
   "그렇소. 그 아이는 특별하오. 애거더는 누구보다도 그런 능력을 많이 받은 아이지요.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알아내기도 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전할 수도 있지요. 또한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과도 이야기할 수 있소."
   "정말 그래요. 동생 루크를 땅 위로 불러 번 것도 애거더였어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슬레얼에서는 당신 동생뿐이오?"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언제 어디서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나로선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아버지가 만드신 방사선을 내는 기계 옆에서 언제나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동생과 같은 분이 우리에게는 필요하오. 어떻든지 가르침받아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있으니까요."
   "여러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셔야 할 일도 많아요."
   그 날 오후, 족장은 마을의 젊은이들에게 폴을 데리고 여기저기를 안내해 주라고 일렀다.
   젊은이들은 폴을 안내하면서 강기슭을 따라 멀리까지 갔다. 강기슭에는 몹시 구부러지고 꺼멓게 황폐해진 옛날의 다리가 여러 개나 보였다.
   모두 동쪽으로 걸어갔다. 그쪽에 옛날의 유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안내해 주는 사람 가운데, 금발 머리를 총총 땋아서 늘어뜨린 소녀가 하나 있었다. 그 소녀는 텔레파시의 힘을 가지고 있어 폴의 말을 참으로 잘 이해해 주었다.
   폴과 소녀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강기슭을 걸어갔는데, 얼마쯤 뒤에 돌을 쌓아올린 큰길 같은 곳이 나왔다. 그 곳은 아득한 옛날 큰 도시의 중심지였다고 여겨지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풀이 자랄 대로 자라 있다.
   로레니아 사람들은 거기에서 필요한 재료를 가져다가 자기들의 마을을 만드는 데 썼다고 한다.
  
   폴을 안내하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는 옛날에는 큰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자리로 그를 데리고 갔다.
   "우리는 앞으로 여기를 파보았으면 해요. 우리는 옛날의 이 언저리 지도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 지도에 바탕을 두고 이 곳을 조사하면 아주 재미있을 거여요."
   그러나 그 소녀는 그런 까마득한 옛날 일보다 지금 일이 훨씬 더 흥미가 있는 모양이다. 소녀는 폴에게 차례로 질문했다. 첫째 그 소녀는 머리칼이 하나도 없는 폴의 반들반들한 머리가 이상하게 여겨져서 견딜 수 없는 모양이다.
   폴은 폴대로 머리에 머리칼이 더부룩하게 나 있는 사람들이 우스웠다. 그러나 한참 보니까 익숙해져서 소녀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금발 머리가 썩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밤, 폴은 땅밑 도시 슬레얼로 되돌아갔다. 새로 친구가 된 로레니아 사람들은 산중턱에 있는 터널 입구까지 배웅해 주었다.
   동생 루크는 아직 몸이 완전히 낫지 않았으므로 로레니아에 남아서 애거더의 보살핌을 받기로 했다.
   폴은 아버지와 함께 회복 광선 기계와 카메라 등을 가지고 이튿날 틀림없이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땅밑 도시로 되돌아갔다.
  

   구조하러 나서는 에릭

  
   전력 센터는 이미 한 시간이 지나도록 무거운 침묵에 휩싸여 있다. 기사들은 누구나 베르나르가 죽은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뒤에는 베르나르의 아버지와 어머니, 기사장, 그리고 몇몇 기사만이 남아 있다. 그 사람들은 여전히 스피커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그 스피커만이 베르나르와 연락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 아이가 죽지 않은 거라면 이렇게 있을 수 없쟎아요. 나는 그 아이가 살아 있을 것으로만 생각돼요. 단지 베르나르는 말을 할 수 없는 것뿐일 거여요."
   베르나르의 어머니가 갑자기 말을 꺼냈기 때문에 모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러자 의사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심장의 고동 소리도 들리지 않고, 혈압의 움직임을 보여 주는 계기도 멈춰 버린 채로 있으니까요."
   그러나 어떤 말도 베르나르가 살아 있다는 어머니의 믿음을 바꿔 놓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절연복이 벗겨졌기 때문에 그럴 거여요. 그렇지 않다면 기계가 망그러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머니의 마음은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이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리려고 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기사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수신 장치를 다시 조정하고, 스피커 앞에 음향 증폭기를 놓아 주시오."
   잠깐 동안 전력 센터 안은 전파를 조절하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곧 그 소리에 섞여서 희미하게 다른 소리가 들려 오지 않는가!
   베르나르의 어머니는 너무 기뻐서 아버지에게 와락 달려들며 소리쳤다.
   "저봐요. 숨 쉬는 소리여요! 숨을 쉬고 있어요!"
   의사도 말했다.
   "그렇소. 틀림없이 숨을 쉬고 있소. 아주 약해져서 천천히 쉬고 있지만 규칙적으로 숨을 쉬고 있소."
   아버지가 굳게 결심한 투로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서라도 베르나르를 구해 내야만 해."
   비록 파이프 관을 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구해 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기사장은 텔레비젼 전화로 달려가자 곧 여기저기로 명령을 내렸다.
   한편 베르나르의 어머니는 베르나르에게 들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여 힘을 내라는 말을 마이크로폰에 대고 계속했다.
   모든 기사들이 명령을 받고 급히 전력 센터로 달려왔다. 재빨리 구조대를 짜야만 했다.
   기사장이 말했다.
   "누가 구조하러 가지?"
   베르나르의 어머니가 말했다.
   "내가 가겠어요. 나는 몸집이 작으므로 파이프 관을 지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파이프 관을 당신이 지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설사 지난다 해도 그들이 만든 터널은 더 좁습니다. 그 곳은 도저히 들어갈 수 없을 겁니다. 베르나르도 가까스로 들어갔으니까요."
   누군가가 말했다.
   "그럼 역시 어린아이라야 하오!"
   "누가 간단 말이오? 이런 사건이 일어난 뒤인데 누가 가 주겠소?"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야말로 큰일이지. 또 도중에 주저앉거나 하게 된다면 절대로 구해 낼 수 없을 테니까."
   베르나르의 어머니가 말했다.
   "잠깐만요. 나는 꼭 제가 하겠노라고 할 아이를 꼭 한 사람 알고 있어요. 몸도 튼튼하고 용기도 있어요. 게다가 형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던져도 괜찮다고 생각할 거여요."
   아버지가 말했다.
   "에릭 말이군! 에릭이 할 수 있을까?"
   "그야 베르나르만큼 재빠르지는 못하겠지요. 하지만 헤엄도 잘 하고, 잠수도 누구에게 지지 않아요. 그 아이가 또렷하고 활발하지 못한 것은 성격이 내성적이기 때문이어요. 형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거여요."
   아버지는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베르나르에게 무전으로 지시했듯이 에릭에게도 지시해 주면 되오. 그러면 마음놓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오. 게다가 형을 구한다는 마음이 두려움을 떨쳐 줄 것이오."
   기사장이 말했다.
   "곧 에릭을 부르기로 합시다."
   그러나 에릭의 부모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에릭은 지금쯤 벌써 잠들었을 테지.......)
   그 말대로 에릭은 분명히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네 집 침대 위에서가 아니다.
   그는 자동 조종 급행 열차의 딱딱한 좌석 위에서 공처럼 몸을 웅크리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자기의 둘레에 일어난 사건 따위는 아무것도 모른 채.......
   땅밑 도시의 밤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그는 남쪽 변두리에 있는 급행 열차 종점에 있었다.
   그는 폴에게 땅 위로 나가는 길을 가르쳐 준 다음 곧 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집까지의 먼 길을, 더우기 아무도 지나지 않는 어두운 길을 혼자서 걸어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에릭은 어머니나 아버지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겠지 생각하고, 아무도 타지 않은 채 종점에 멈춰 있는 급행 열차 안에서 밤을 지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기는커녕, 아버지와 어머니는 급히 집으로 돌아와 보고 에릭의 침대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보자 마치 미친 사람처럼 되었다. 곧 비상 사이렌이 울려 퍼지고 수색대가 출동하여 땅밑 도시 구석구석을 찾기 시작했다. 스피커는 끊임없이 에릭의 이름을 불러 댔다.
   그래도 에릭이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수색을 쉽게 하려고 한 번 끊었던 전류를 다시 넣었다.
   에릭은 급행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므로 아침이 된 것으로 생각했다.
   (야! 밤이 무척 짧아졌는데.)
   자동 조종되는 급행 열차가 자기가 내려야 할 역에 닿았을 때 에릭은 그렇게 여겼을 뿐이다.
   에릭은 너무나 졸려서 스피커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본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주의하지 않는 소년이었다.
   집에 들어가자 에릭은 아버지에게 붙잡혀 그대로 전력 센터로 끌려갔다. 그래도 아직 반쯤은 잠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어머니는 에릭을 꼭 끌어안았다. 에릭은 그제서야 모든 사람의 관심이 자기에게로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릭은 서둘러 찬물로 샤워를 하고 잠을 깨게 하는 주사를 맞았다. 그리고 모두가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까닭을 알게 되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에릭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위험하기 이를데없는 그 일을 맡았다. 형을 구해 내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기뻐서 가슴이 뿌듯해지기까지 했다.
   에릭은 곧 기사들이 가르쳐 주는 여러 가지 일을 배웠다. 기사들은 번갈아가며 자기들이 전문으로 맡고 있는 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절연복 다루는 법, 레이다에 대하여, 무전 장치가 달려 있는 마스크에 대하여, 탐지기가 장치되어 있는 팔찌에 대하여, 사다리에 대한 주의 등.
   의사는 작은 것이었지만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구급용 의료 상자를 가지고 왔다.
   동굴 구조대 사람들은 들것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벨트와 밧줄을 어떻게 걸면 베르나르를 안전하게 운반해 올 수 있는가 하는 것도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어떤 기사는 급히 전지로 움직이는 작은 윈치(감아올리는 기계)를 만들어 주었다. 그것이 있으면 부상한 베르나르를 들것에 눕힌 채로 높이가 다른 파이프 관에 옮길 수 있다.
   광산 전문 기사는 바위 부스러기며 돌로 막혀 있는 터널을 빠져나오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가르쳐 주었다.
   동굴 학자는 길고 좁은 파이프 관을 지나갈 때에 느끼는 불안한 마음이며 그것을 가라앉히는 방법 등에 대해 여러 가지로 주의를 주었다.
   "알겠지? 이따금 멈추어 서서 호흡을 조절하여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20시간은 걱정하지 알아도 될 만큼 충분한 공기가 있으니까. 베르나르가 있는 곳에 닿으려면 2시간쯤 걸릴 게다."
   또 기사들은 부상당한 베르나르에게 공기를 보급해 주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그는 형을 위해서 마스크와 목마름을 없애 주는 캡슐도 가지고 가기로 했다.
   떠나기 전에 에릭은 형의 괴로운 듯한 숨소리가 증폭되어 들려 오는 스피커 앞으로 가서 마이크로폰을 향해 크게 외쳤다.
   "형, 내가 구하러 갈께 걱정하지 마. 틀림없이 구해 낼 테니까."
   에릭은 어머니에게 입맞추고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아버지의 어깨에 올라탔다. 아버지는 에릭을 목말 태우고 제5호 파이프 관 입구로 데리고 갔다.
   에릭은 도구를 담은 소시지 모양의 가방을 끌면서 곧 파이프 관으로 들어갔다.
   스피커에서는 앞으로 나아가는 에릭의 모습이 눈으로 보는 것처럼 들려 온다. 몇 분이 지나자, 에릭은 가방을 끌고 파이프 관 속을 어떻게 하면 쉽게 나아갈 수 있는지 안 모양이었다.
   파이프 관이 직각으로 내려간 어려운 곳도 에릭은 형을 구해 내려는 한마음으로 무사히 지나,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에릭은 형 베르나르가 갇혀 있는 터널에 닿았다. 에릭은 바위 부스러기가 터널 입구를 막아 버리지는 않았다고 센터에 보고했다. 그리고 바위 벽이 울퉁불퉁한 터널로 들어갔다.
   그는 센터에 보고했다.
   "바위가 허물어진 곳에 왔어요. 이대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므로 이제부터 바위 부스러기를 치우는 작업을 시작하겠어요."
   에릭은 광산 전문 기사 지시에 따라 크고 작은 바위와 돌을 치우는 일을 시작했다. 전지로 움직이는 윈치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일을 하는 동안에 그는 도구를 다루는 일도 익숙해져서 작업은 점점 빨리 되어 나갔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에릭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 나왔다!
   "앗! 형이 보여요! 형을 찾았어요!"
   곧 의사가 나와 하나하나 지시했다. 에릭은 기계처럼 의사가 명령하는 대로 따라 했다.
   베르나르는 이마에 상처를 입었으나 그 밖에는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절연복이 찢어졌어요, 마스크도 떨어졌고요. 기절해 있어요. 무너진 터널 천장이 다리 위에 떨어져 있어요. 하지만 윈치로 움직일 수 있겠어요."
   에릭은 의사의 지시에 따라 응급 치료를 끝낸 다음 구조 작업을 시작했다. 위험한 곳에서 베르나르를 움직이는데 성공하자, 다음에는 천천히 윈치를 써서 들것에 옮겨 파이프 관 옆까지 운반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정말로 힘든 작업이어서 한 시간쯤 걸려 가까스로 해냈다.
   녹초가 되도록 지쳐 버린 에릭은 잠깐 동안 쉬면서 식사용 알약을 먹고 또 목마름을 없애 주는 캡슐을 삼켰다.
   에릭은 형을 파이프 관 속으로 옮기고 터널과 파이프 관 사이를 금속판으로 단단히 막았다.
   그리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부상당한 형을 들것에 단단히 붙들어매고 끌면서 나아가는데 어찌나 무거운지 숨이 차서 견디기 어려웠다.
   높이가 다른 파이프 관으로 옮길 때에는 정말 힘들었다. 그는 자주 멈추어 쉬어야만 했다.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해 끝까지 해냈다. 입구에 닿자 에릭은 어머니에게 형을 넘겨주었다.
   베르나르의 두 다리는 피가 돌지 않아 마비되어 있었다. 깨끗이 나으려면 여러 달 걸리겠지만 생명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베르나르의 힘으로 땅밑 도시 슬레얼은 위험을 벗어나게 되었다.
  

   공개 텔레비젼 연설

  
   땅밑 도시 슬레얼의 공개 텔레비젼 시간이다. 아나운서가 말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 주간에 가장 중요하고, 슬레얼의 모든 시민에게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 '우리의 뛰어난 웅변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앞날이 기대되는 소년 웅변가 가운데 한 사람인 폴 15P9의 웅변이 있겠습니다. 폴 15P9는 아프시론 광선을 발견한 위대한 과학자의 아들이며 웅변 대회의 최고 우승자이기도 합니다. 과연 그가 여러분에게 무슨 웅변을 할 것인지 기대됩니다. 그럼 폴 군, 부탁합니다."
   폴의 모습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폴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저 최고 회의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제1급 시민이 될 자격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법률을 어긴 사람으로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한 시간 동안 내가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슬레얼의 모든 시민을 위해서입니다.
   땅 밑에 사는 다른 사람들......우리는 그 사람들을 지금도 여전히 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과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나는 이 자리에서 제안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러분의 결정에 의한 것이므로 나는 그 결정에 따르려고 합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어제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을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최고 회의의 지도자들은 모두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기 시작했다.
   "폴은 저의 아버지를 꼭 닮았군요. 먼저 자기가 행동하고, 그런 다음에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는 식이니 말이오."
   "정말이지 사람을 얕보는 행동을 하는 소년이쟎소! 금고형(집에 가두고 밖에 내보내지 않는 벌)으로 벌주어야 마땅할 것이오."
   "첫째 우리의 위신이 떨어지는 일이오, 저런 건방진 태도를 취하게 내버려 두는 것은."
   "그렇지만 폴에게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쟎소? 아니면 지금 중지하라고 하겠소."
   "나는 폴을 개인적으로도 알고 있는데 매우 성실한 소년이오. 귀찮은 말썽을 일으킬 그런 소년은 아니라고 생각하오만......."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방송을 그대로 계속하도록 지시합시다."
   "아! 여러분, 저 스크린에 나타난 저 사진 좀 보시오."
   "오오! 이건 또 뭐란 말이오...... 이제까지 본 적도 없는......정말 뜻밖의 일이오......."
   최고 회의 지도자들이 말한 그대로였다. 지금 땅밑 도시 슬레얼의 사람들 눈앞에 놀라운 사진이 차례차례 멋진 색채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눈에 스미도록 짙은 녹색 잎이 달린 나무들이 맑게 갠 푸른 하늘 아래 또렷하게 찍혀 있였다. 녹색 풀밭에는 눈부시게 새빨간 꽃들이 가득 피어 있다. 날개를 활짝 펼친 흰 새가 한가로이 하늘을 날고 있고, 저 멀리 보이는 산은 꼭대기에 흰 눈을 이고 하늘 높이 솟아 있다.
   방송 담당자는 폴의 너무나도 대담한 행동에, 이렇게 하도록 내버려둔 자기가 일자리에서 쫓겨나는 게 아닐까 하고 마음 죄고 있었다.
   그러자 그 때 최고 회의에서 폴의 방송을 계속하라는 지시가 전해졌으므로 방송 담당자는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었다.
   땅 위의 사진이 끝나자 다시 폴의 모습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최고 회의 지도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슬레얼의 모든 시민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가 이 지구에 사는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아득한 옛날에 있었던 큰 전쟁의 재해로부터 살아 남은 유일한 생존자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같은 땅 속에 우리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우리의 머리 위인 땅 위에도 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내 동생과 나, 이렇게 셋은 땅 위에 사는 그 사람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땅 위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밝은 햇빛 아래서 지낸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환영의 말이 가득 담긴 메시지를 받아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폴은 동생 루크와 땅 위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어떻게 해서 발견했는가 하는 일이며, 애거더와의 우정, 아프시론 광선을 쓴 일이며, 로레니아 마을을 처음 보았을 때의 인상이 어떠했으며, 의사인 아버지가 그 마을에 갔던 일 등을 간단하면서도 명확하게 말했다.
  
   "저희 아버지 의사 15P9는 땅 위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조사했는데, 그 결과 땅 위의 공기는 맑고 깨끗하며 그 무서운 방사능은 이미 완전히 없어졌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파괴된 지구는 또다시 숨을 쉬기 시작하여 지금은 완전히 살아난 것입니다. 실로 오랫동안 우리로부터 버림받았던 땅 위는 전보다 한층 더 아름다와져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땅 위에 대해 품어 왔던 여러 세기에 걸친 공포감을 우리는 이제야말로 이겨내야 합니다.
   현명하신 분들은 아마도 반대하실 것으로 여겨집니다만, 나로서는 반대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내 마음속은 지금도 땅 위의 로레니아 마을에서 지냈던 그 훌륭하고 즐거운 일들이 가득합니다. 이제부터 어떤 일이 일어나건 그것과는 관계없이 공기도 햇빛도 없는 이 땅 밑에 틀어박혀 있을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또 땅 밑에 사는 다른 사람, 그들과의 문제도 동시에 해결해 줄 거라고 여겨집니다.
   무전 기술자들은 그들과 연락하려고 낮이고 밤이고 쉬지 않고 애쓰고 있습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그들과 연락이 닿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기술적으로 전력 생산이 어려있기 때문에 우리의 전력을 훔치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 문화를 교환하면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싸움이라는 수단에 의하지 않고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요?
   자연의 아름다움을 맛보려면 자연 그 자체를 실제로 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께 보여 준 사진들은 24시간에 걸쳐 나에게 잊혀지지 않을 감동을 준 땅 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도 보았듯이 땅 위에는 낮과 밤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해와 달이 있고, 별이 반짝이며, 숲이 있고, 시냇물이 있습니다.
   주의해서 그것들을 본다면 자연은 우리의 선조들이 본 것보다도 훨씬 아름답게 우리의 눈에 비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조들은 자연에 너무 익숙해 있어서 지금의 우리처럼 자연을 맛보는 즐거움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뜻에서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땅 위 세계를 발견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의 형제라고 해도 좋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슬레얼의 시민 여러분, 나는 땅 위 세계를 여러분께 진심으로 권하고 싶습니다!"
  
   다시 스크린에 비친 땅 위 세계는 땅밑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가슴에 그 곳에 살았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일깨워 주었다.
   또다시 최고 회의로부터 지시가 있어 폴이 땅 위에서 보고 느끼고 맛본 갖가지 체험에 대해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방송 시간이 연장되었다.
   폴은 로레니아 마을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나이 많은 족장에 대해서, 애거더와 그녀의 오빠에 대해서, 그리고 어느 사진에도 나타나는 폴의 안내를 맡아 주었던 금발 머리의 아름다운 소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렇게 해서 그 때까지 큰 죄로만 여겨졌던 행동에 대한 폴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전에는 한 번도 그래 본 예가 없는 프로그램 예정 시간을 훨씬 넘어 다음 음악 시간까지 이어졌다.
   방송 담당자는 혼자 애를 태울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최고 회의가 허락한 일이니 방송국 주임이 뭐라고 하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할 오케스트라 단원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정해진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자기 집 텔레비젼 앞에 꼼짝하지 않고 붙어 앉아서 집을 나오는 일조차 잊고 있었다.
  

   새로운 출발

  
   베르나르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자기 침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친형인 폴이 땅 위에서 가져다 준 단풍나무 꿀로 만든 달콤한 시럽을 마시면서.
   폴은 땅밑 도시에서는 아무도 접시와 스푼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던 것이다.
   베르나르가 에릭에게 말했다.
   "폴은 언제나 말솜씨가 훌륭하거든. 그가 최고 회의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너도 보았지?"
   "응, 물론 그래. 폴의 혀는 잘 도니까. 그 때문에 이득이 되는 것도 있지만 손해를 보는 일도 많을 것으로 생각해. 지금만 해도 그렇쟎아. 폴은 덕분에 일거리를 잔뜩 짊어진 꼴이 되었으니까 말야."
   에릭은 무심코 그렇게 말한 것이었지만 실제로 그 말대로였다.
   베르나르가 말했다.
   "그렇다고 생각해. 땅 위에서 하루 종일 탐험하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야 했으니까 말야. 게다가 저렇게 오래 이야기를 했으니 힘들 거야."
   그러자 아버지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땅 위에서는 별로 힘들지 않았을 게다. 안내인으로 아름다운 소녀가 언제나 함께 다녔으니까 말이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말했다.
   "그 아름다운 금발 머리 소녀 말인가요? 그 소녀라면 나도 한번 만나 보고 싶어요."
   에릭이 물었다.
   "어머니, 우리도 땅 위에 갈 수 있나요?"
   "그럼, 갈 수 있고말고. 그렇게 하는 편이 베르나르의 건강에도 훨씬 좋다고 생각해. 햇빛 아래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에릭이 이번에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우리는 곧 땅 위의 큰 강―센트로렌스 강에서 헤엄도 칠 수 있나요? 난 옛날의 다리에서 물에 뛰어 들어 보고 싶어요."
   "못할 것도 없지. 물은 아주 맑고 깨끗할 테니까. 너만 괜찮다면 내일이라도 가 보기로 하자."
  
   땅밑 도시에서 땅 위로 올라온 기사장은 부하에게 물었다.
   "자네는 실을 물 속에 던져 넣어 물고기를 잡는다는 이야기를 진짜 믿나?"
   "세계가 멸망하기 전 우리 선조들은 그렇게 했었다지 않습니까?"
   "그럼 해보겠나? 금발 머리의 키 큰 남자가 폴에게 말했다더군! 나를 배에 태워 데려가 주겠다고. 하지만 강물에 실을 늘어뜨리고 앉아 있으면 무슨 재미있는 일이 생기겠나, 그것을 들고 있는 동안은 꼼짝도 하지 않고 몇 시간 동안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지 않는가? 뭐 그것도 좋겠지. 한번 해보기로 하세."
   부하가 크게 웃었다.
   "어째서 웃는 건가?"
   "기사장님이 슬레얼의 맨 첫번째 낚싯군이 되는 셈 아닙니까?......첫번째 낚싯군......기사장님이 휴가를 낚시질로 보내다니......이건 무엇보다도 훌륭한 구경거리겠는데요......."
  
   최고 회의 지도자들도 땅 위에 나와 로레니아 마을의 높은 족장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지도자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나이 든 족장을 크게 칭찬했다.
   "참으로 위엄이 있소!"
   "대단하군요."
   "흰 수염과 긴 머리칼 때문이라고 여겨지오."
   "정말 그렇게 생각하오?"
   "생각하다마다. 저 사람이 여느 사람과 다른 것은 흰 수염과 머리칼 때문이라고 여기오."
   그러자 한 지도자가 머리칼 하나도 없는 자기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의사 15P9가 저렇게 수염과 머리칼이 나게 하는 방법을 발견해 주면 얼마나 좋겠소."
  
   한편 의사 15P9는 루크의 머리에 손을 올려 놓고 웃으며 물었다.
   "루크, 애거더처럼 머리칼을 기르고 싶은 생각이 있느냐?"
   "아빠, 머리칼을 나게 할 수 있을까요?"
   "연구해 볼 생각이다. 아무튼 머리칼이 없으므로 일사병을 앓게 되는 사람이 무척 많아질 테니까. 게다가 머리칼이 있으면 숲에서 캠프할 때 모기에게 물리지도 않을 테고. 벌써 식사 조리부에서는 나에게 머리카락이 나게 하는 합성 호르몬을 긴급히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 왔단다."
  
   폴의 안내를 맡은 금발 머리의 아름다운 소녀가 물었다.
   "폴, 너는 오늘밤의 땅밑 도시의 공개 텔레비젼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거야?"
   폴은 일하던 손을 멈추고 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둘이 갔던 옛날의 몬트리올 유적에 대해서 말하려고 해. 그리고 내 고고학상의 발굴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거야. 내가 발굴한 출토품에 대해서 말야. 자 이 녹색 병을 좀 들고 있어 줘? 너하고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서 그래. 병만 찍으면 싱거우니까......아무튼 네 금발 머리는 정말 아름답구나......."
  

   지은이와 작품에 대하여

  
   'SOS 땅밑도시'는 소년소녀를 위해 씌어진 SF 작품이다.
   SF가 어떤 것인가를 대영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밝히고 있다.
   '미래의 과학적인 발견에서 생겨나는 사람들의 일이나 전쟁, 모험 등을 다룬 소설을 말한다.'
   물론 요즘은 이와 다른 견해도 나오고 있음을 말해 둔다.
   SF의 시작은 멀리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학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이 읽는 문학의 한 형식으로서의 SF는 프랑스의 문학자 쥘 베르느가 창조한 것이다.
   쥘 베르느는 1828년에 프랑스의 낭트라는 항구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공상적이었고 모험심에 차 있었다.
   18살 되는 해에 파리로 나와 대학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했으나 태어날 때부터 공상적이었던 베르느에게는 딱딱한 법률이 맞지 않았다. 시라든가 소설이라든가 희곡 등에 흥미를 가지고 그런 책만을 골라가며 읽었다.
  
   미국의 유명한 문학가 에드거 앨런 포우의 영향을 받은 그는 그 무렵 갑자기 발달하기 시작한 과학에 밑바탕을 두고 그의 풍부한 상상력을 자유로이 써서 공상과학 소설, 다시 말해서 SF라는 하나의 새로운 소설 형식을 만들었다.
   그가 쓴 과학모험 소설이 그때까지의 모험소설과 다른 것은 그의 독특한 사회관과 새로운 과학 지식에 의해서 씌어져 있기 때문이다.
   베르느의 공상력은 특히 뛰어나 실제의 과학 발달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그가 소설 가운데서 그려 보인 수많은 과학적인 새로운 생각, 이를테면 비행기, 무선전화, 로켓, 헬리콥터, 전송사진, 텔레비젼, 잠수함 등이 그 뒤 몇십 년이 지난 뒤 차례로 만들어져 쓰이고 있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베르느는 그 무렵의 과학자들이 쓴 책을 열심히 읽고 새로운 지식을 쉴새없이 받아들였다. 그 부지런한 노력과 천재적인 공상력이 서로 합쳐져서 태어난 것이 그의 SF이다.
  
   베르느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달세계 여행', '땅 밑 탐험', '바다밑 2만 리' 등이 있다.
   베르느보다 40여 년 뒤에 태어난 영국의 웰즈는 베르느의 뒤를 이어받아 SF를 보다 더 현대적으로 다룬 문학가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베르느와 웰즈가 다른 점은 베르느는 언제나 미래에 이루어질 것 같은 발명이나 발견에 밑바탕을 둔 SF를 써서 읽는이에게 그것이 실현되는 날을 상상케 하며 거기에서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썼다.
   그와는 달리 웰즈는 반드시 과학적인 정확성에 중점을 두고 있지는 않다. 그는 읽는이에게 재미와 기발한 아이디어를 주려고 SF를 썼다고 한다.
   웰즈의 대표적인 SF 작품에는 '타임머신', '달세계의 첫 사람', '투명인간', '우주전쟁' 등이 있다.
   그리고 현대의 SF 종류는 우주물, 시간과 차원물, 초능력물, 미래 과학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 'SOS 땅밑도시'는 이 가운데 네 번째에 해당되는 것으로 내용은 31세기 세계를 다루고 있다.
   과학을 발달시킨 것은 분명 사람인데 그 인류가 과학의 노예가 되어 세계를 멸망시킨다. 땅 밑으로 피해간 덕분에 살아 남은 사람들은 그곳에서 도시를 이룩했다. 몇 세기 뒤 사람들은 다시 그리운 땅 위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은 몇몇 용감한 사람들의 힘이 컸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수잔 마르텔로 프랑스계 캐나다 사람이다. 여섯 아이의 어머니이며 남편은 어느 단체의 전속 변호사이다.
   마르텔은 캐나다의 퀴벡 시에서 태어나 터론토 대학을 졸업했다.
   한때 퀴벡 시에서 신문 기자로 일한 일도 있으나 현재는 주부로서 생활하고 있다.
   'SOS 땅밑도시'를 쓰게 된 동기는 어느 날 이 책에 씌어 있는 것과 같은 땅밑도시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 자기의 아이들이 머리칼이 없는 모습으로 그곳을 뛰어다니는 모습이 선히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책의 본디 제목은 '서기 3천 년의 몬트리올 네 소년들'이다. 1963년에 캐나다 아동문학상인 'ACELF 상'을 받았다.
   이 아동문학상은 캐나다에 사는 프랑스계 교육가 단체가 주는 상으로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옮긴이 정 동화
   캐나다 터론토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 대학교 교수를 지내다.
   현재 한성대학교 문리대 교환교수로 와 있다. 지은책 <근대 영미 소설 연구>, 옮긴책에 드웨이트 <바람과 모래의 비밀>이 있다.
  
  
   우주과학어드벤처ET·ET11
   SOS 땅밑도시
  
  
   펴낸날 1983년 10월 9일
   지은이 수잔 마르텔
   옮긴이 정 동화
   펴낸이 고 정일
   펴낸곳 동서문화사
   서울 강남구 신사동 514∼15
   543-4466, 4477 등록 2∼101(윤)
   값 3,990원
  
  
   * 옮긴이와 협약에 의해 인지는 붙이지 않습니다.
   * 잘못 만들어진 책은 바꾸어 드립니다.